한진해운이 퇴출되면서 유일한 국적 원양 컨테이너선사가 된 현대상선을 키우려 한 정부의 의도가 무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대상선을 제치고 한진해운의 아시아-미주노선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SM그룹이 원양 컨테이너선 사업기반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어서다. SM그룹이 원양 컨테이너선 업계에 안착하면 국내 해운업계는 현대상선·SM그룹 양강 체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정부는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현대상선을 지원해 국내 해운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21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현대상선은 글로벌 해운동맹 2M에 가입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한 해운전문지는 2M을 구성하고 있는 글로벌 해운사 머스크가 현대상선을 동맹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지난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에 현대상선은 “명백한 오보”라고 반발했지만 업계는 현대상선의 2M 가입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현대상선은 그동안 이달 말까지 2M 가입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수차례 밝혀왔지만 이번에는 “늦어도 다음달 초까지”라며 시한을 미뤘다.
해운업계는 그 동안 현대상선의 2M가입에 꾸준히 의문을 제기했다. 2M은 글로벌 1·2위 해운사인 머스크·MSC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2M은 상대적으로 물동량 장악력이 취약한 아시아-미주 노선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현대상선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진해운의 몰락으로 아시아-미주노선이 무주공산이 되면서 현대상선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유인이 떨어졌다는 게 해운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실제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뒤 머스크와 MSC는 각각 6척의 컨테이너선을 아시아-미주 노선에 새롭게 투입한 바 있다.
2M은 현대상선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세우기도 했다. 2M 측은 현대상선에 선대를 늘리지 말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작 자신들은 지난 몇 년동안 초대형 컨테이너선(1만3000TEU급 이상·1TEU는 6m짜리 컨테이너 1개)을 잇따라 도입하며 선대 규모를 키우며 해상 운임 치킨게임을 벌여왔지만 현대상선이 규모를 키우는 것은 막는 것이다.
현대상선은 초대형 선박 위주의 선대 규모 확장이 절실한 상황이다. 글로벌 컨테이너선 운임이 바닥을 기고 있어 컨테이너당 운송 비용을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미주 서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파나마 운하가 확장개통하면서 큰 선박을 확보하지 않으면 원가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다. 이전까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선박 규모는 5000TEU급이었지만 확장 개통으로 1만3000TEU급의 초대형 컨테이너선도 파나마 운하를 통해 미주 동서안을 이동할 수 있게 됐다.
현대상선이 주춤하는 사이 SM그룹은 원양 컨테이너선 사업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날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를 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법과 미주노선 입찰 본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이번 계약의 매각 대상에는 한진해운의 아시아노선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SM그룹은 한진해운 자산 중 가장 알짜로 꼽히는 미국 롱비치터미널 지분 54% 매각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도 확보하고 있다. 다만 롱비치터미널의 2대주주인 MSC가 한진해운 지분에 대한 우선매수청구권을 갖고 있어 SM그룹이 순조롭게 한진해운의 지분을 확보하려면 MSC의 동의가 필요하다. 최근 법조계 일각에서는 한진해운이 청산절차를 밟고 있어 MSC가 가진 우선매수청구권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SM그룹은 대한해운과 삼선로지스를 잇따라 인수하며 벌크선 사업으로 해운업에 입문했다. 이번에 한진해운의 영업망을 인수하면서 컨테이너선 사업까지 시작하면 종합 해운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컨테이너선에 집중돼 있는 현대상선보다 사업 포트폴리오는 더 낫다. 벌크선 사업은 화주와 장기 계약을 맺는 게 일반적으로 불황기에도 어느정도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정부는 한진해운을 지원해 한국 해운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당초 계획이 빗나갔지만 SM그룹의 부상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 1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SM그룹의 한진해운 미주노선 영업망 인수는 한진해운의 정체성과 가능한 많은 인력·영업망을 보존하는 차원도 있다”며 “현대상선의 대체·보완적 경쟁 선사가 하나쯤 있는 것도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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