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계 해양플랜트 악몽이 시추설비 분야에서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저유가 상황이 지속되면서 해저 유전을 탐사하는 데 쓰이는 시추설비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있어서다.
사용할 곳이 정해진 생산설비에 비해 탐사에 쓰이는 시추설비는 발주처가 인도를 피하려고 할 위험이 더 크다. 석유업체들은 시추설비로 해저 유전을 탐사해 경제성이 있다고 평가되면 그 위에 설치할 생산설비를 발주하기 때문이다. 시추설비에는 드릴십, 세미리그(반잠수식 시추선), 잭업리그(고정식 시추설비) 등이 있다.
24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이 짓고 있는 시추설비 대부분은 1회 이상 인도를 연기한 상태다. 올해만도 삼성중공업은 드릴십 2척의 인도를 연기했다. 대우조선해양은 드릴십 2척, 잭업리그 1기의 인도시기를 늦추기로 발주처와 합의했다.
현재 짓고 있는 시추설비들은 상당수 용선처를 확보하지 못했다. 보통 시추설비 발주사들은 용선처를 구해 설비를 빌려주고 용선료를 받는다. 용선 계약이 맺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설비가 완성되도 사용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삼성중공업은 현재 확보한 시추설비 수주잔량 10척 중 7척이 용선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밝혔다. 대우조선해양의 시추설비 수주잔량 9척 중 4척도 아직 용선 계약이 맺어지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이 건조한 시추설비 1척도 발주처와 계약을 해지하기로 한 뒤 현대중공업이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다.
시추설비 인기가 떨어진 것은 용선료 변화로도 드러난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국내 조선사들이 시추설비를 대거 수주한 2012~2013년에는 드릴십 1척의 용선료가 하루 60만달러에 달했지만, 최근 30만달러대로 반토막이 났다”며 “당시에는 3년 정도 배를 빌려주면 건조대금을 회수했지만 지금은 그 기간이 두배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해양 시추설비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저유가 상황이 지속돼 석유업체들이 심해 유전 탐사의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해서다. 최근 주요 외신들은 글로벌 석유 업체들이 비용이 많이 드는 해양 시추 프로젝트 대신 기술 발전으로 채굴 비용이 낮아진 셰일오일 개발에 나서고 있다고 일제히 보도한 바 있다.
여기에 국내 조선업체들이 수주한 시추설비들은 극한 상황에서도 시추작업을 할 수 있도록 설계돼 가격이 비싸다. 전날 현대중공업이 노르웨이 선사에 선수금을 돌려주고 소유권을 넘겨받은 세미리그는 북극해역에서 시추작업을 하기 위해 발주된 설비로 규모가 크고 높은 파도와 저온에 견디며 시추작업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계약 규모는 약 6억2000만 달러다.
대우조선해양이 짓고 있는 시추설비들도 통상적인 시추설비 가격보다 비싸게 계약돼 있다. 회사 측에 따르면 8척의 드릴십의 평균 건조 대금은 약 6억 달러이며, 잭업리그 1기는 약 5억3000만 달러에 계약했다. 업계에 따르면 시추설비 중 드릴십의 가격이 가장 비싸고, 보통 5억 달러 선에서 계약이 맺어진다. 삼성중공업도 드릴십 7척, 세미리그 1척, 잭업리그 2척의 계약 규모가 모두 59억 달러로 평균적으로 척당 5억9000만 달러다.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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