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6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한국판 양적완화와 관련해 “이건 한번 우리가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야 된다는 입장”이라며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이 되도록 힘을 쓰겠다”고 말했다. 물론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총선 패배로 사그러지는 듯했던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은 박대통령의 이번 언급으로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됐다.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반대논리는 다분히 교과서적이다. 논리적으로 정연하다.
정치권에 떠밀려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중앙은행 독립성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고, 인플레이션과 자본유출, 업종간 형평성 등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근본적으로 양적완화는 통화의 역외수요가 받혀주는 기축통화국의 전유물이라는 입장이다. 현행 1.5%인 기준금리의 추가 인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너무 성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돈이 없어서 구조조정을 못하는 거냐’는 반론은 폐부를 찌른다.
하지만 금새 되묻게 된다. 지금 우리는 교과서를 고집할 만큼 한가한 상황인가.
실제로 한국판 양적완화 찬성론자들은 한국경제가 처한 급박한 현실을 주된 근거로 삼는다. 그들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정도로 한국경제가 위중하다’고 진단한다.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청년실업대란, 가계부채 폭증의 부작용 등을 바로 잡으려면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한은 기준금리 인하가 경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인플레이션 우려도 높지 않다고 꼬집는다. 잠재성장률 추락을 가만 지켜볼 것이 아니라 뭐라도 할 수 있을 때 손을 써보자는 얘기다.
위기때마다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혈로를 뚫어온 것은 한국경제의 운명적 전통이다. 고단하고 위태로운 고비들을 그렇게 넘겨왔다. 멀게는 1970년대 오일 쇼크를 중동 건설시장 진출로 돌파했고, 가깝게는 2008년 미국과 300억달러 통화스왑을 맺음으로써 위기를 벗어났다. 1997년 외환위기 때에는 금 모으기라는 유례없는 시도까지 이뤄졌다. 한국판 양적완화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선거는 끝났다. 한국판 양적완화를 특정 정당의 어젠다로 폄하할 필요가 없다.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작명에 집착할 것도 아니요, 처음 화두를 꺼낸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의 아이디어를 만고불변의 대안으로 떠받들 필요도 없다. 이제는 가능한 모든 대안을 상정해놓고 열린 토론에 나서야 할 때다. 무조건 안된다고 하기에는 한국경제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일부 조건을 붙일지언정 파격적 통화정책 자체에는 찬성표를 던지는 이유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미국, 일본, 유럽의 양적완화와는 다르고, 달라야만 한다. 그들의 실패를 답습할 이유가 없다.
양(量)이냐, 질(質)이냐. 사실 양과 질이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경제를 미래를 놓고 굳이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인 경우가 많다. 질적 개선과 성장이 한국경제 발전의 나아가야할 방향이다. ‘한국판 양적완화’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통화의 양만 늘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건 중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의 옵션이 될 수 없다. ‘양적’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한국판 양적완화의 목적은 한국경제의 ‘질적’ 개선이어야 한다. 한은이 가진 거시적인 시장조정 능력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한국경제의 고질병인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가능하다면 가계부채 문제를 일부라도 풀어보자는 발상이다.
우선 한국 가계부채는 1200조원이라는 규모도 엄청나지만, 만기 구조가 단기에 집중돼있다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 저금리인 지금은 그럭저럭 버텨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금리가 오르거나 집값이 떨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만기·금리구조를 뜯어고칠수 있는 곳은 한은 뿐이다. 한은이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증권(MBS) 등 장기채권을 인수해줌으로써, 이를테면 ‘3년 만기 변동금리 대출’을 ‘20년 만기 저리대출’로 전환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가계주택대출의 만기·금리 구조만 바꿔주는 것인 만큼 통화량 급증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기업 구조조정에서도 한국판 양적완화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산업은행을 단일채널로 활용함으로써 관치금융 논란이 벌어질 소지가 있다면 다른 방법은 많다.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은행들의 자기자본비율(capital adequacy ratio)의 악화는 피할 수 없는 경로다. 한은의 역할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정리채권들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정리채권을 사들이는 SPC(특수목적회사)에 출자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행이 출자했던 부실채권정리기금과 유사한 구조다. 은행은 자기자본비율 저하와 대규모 손실에 대한 걱정을 덜고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공식 해체된 부실채권정리기금은 최종 결산 단계에서는 꽤 많은 수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른 방법도 많다. 현행 한은법이 허용하고 있는 금융안정기금이나 특별융자 제도를 활용할수도 있다. 상당수 경제학자들은 산은채 대신 장기 국고채를 사들이는 ‘한국판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를 제안하기도 한다. 중앙은행이 단기국채를 팔고 장기국채를 사들임으로써 장기금리 하향안정과 투자 활성화를 유도하자는 얘기다. 미국 연준(Fed)이 2011년 도입해 재미를 봤던 방식이다.
현행 한은법은 금융시장 안정을 의무로 명시해놓고 있다. 원론적으로 봤을 때 한은이 왜곡된 시장에 대한 질적 개선에 나선다고 해서 현행법에 저촉될 것이 없다.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규정 손질이 필요하다면 그때가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뜬금없이 한은법 개정부터 들고 나오는 것은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불필요한 논쟁거리는 피해가는 것이 낫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한국판 양적완화의 결정 주체는 어디까지나 한국은행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거시적인 시장조정 능력을 가진 것은 한은 뿐이다. 금융위나 금감원은 규제와 감독을 활용하는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무절제한 발권력 동원을 막을 수 있는 규율(discipline)은 현대국가의 흔들릴 수 없는 가치다. 한국판 양적완화를 한은 기능의 약화 또는 형해화로 연결시킨다면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될 것이다. 지금의 한은은 예전의 한은이 아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22일 금융협의회에서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용경색 등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다양한 정책수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가겠다”고 말했다.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제는 한은도 제 목소리를 내야한다. 전향적 검토와 실행을 기대한다.
[이진우 매일경제신문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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