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면 주변에서 화병(火病)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명절 화병은 명절 때 받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또는 육체적 고통을 겪는 것을 말한다. 임원정 이대목동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화병은 주로 10년 이상 감정표현을 못 하고 지내다가 나이가 들고 심신이 약해지면서 감정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며 "화병은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을 주기 때문에 빨리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화병환자 중 90% 이상이 중년 여성일 정도로 화병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많이 생기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화병은 특별한 외상이 없기 때문에 방치하기 쉽지만 지속되면 고혈압이나 뇌졸중과 같은 심·뇌혈관계 질환이나 위식도역류질환 등이 생길 수 있다. 최근 들어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화병 환자가 늘고 덩달아 명절 직후 이혼이 증가한 이유도 높아진 여권 신장이 한 몫하고 있다.
김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과거 여성은 이러한 상황을 수긍하고 받아들였지만, 젊은 여성은 남녀평등을 강조하는 세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더 큰 반발심을 갖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며 "여기에 시댁과 갈등이 있거나 남편이 상대적으로 친정에 소홀한 모습을 보이면 긴장과 분노, 좌절감 등의 불쾌한 감정이 더욱 커지고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심각해지면 화병·우울증 증세로 발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화병은 울화병(鬱火病)이라고도 불린다. 화병 유병률은 국민의 4~5%로 최근 여성암으로 투병중인 환자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기도 했다.
화병은 주로 억울한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억제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 즉, 울화로 인해 나타나는 병증을 일컫는다. 심리적인 쇼크나 정신적인 갈등에 의해 뇌에 눈으로 보일 만큼의 변화는 없이 정신적 혹은 신체적인 증상을 수반한다. 일반적으로 우울 및 불안증상과 더불어 여러 가지 신체증상이 나타나는 증후군을 말한다.
미국정신의학회는 1995년'화병'을 'hwa-byung'이라는 우리말 용어를 사용하면서 '한국민속증후군의 하나인 분노증후군'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화병은 오랫동안 남성위주 사회에서 억울함을 참고 지내온 중년 여성들, 즉 40~50대 여성들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화병 원인은 배우자나 시부모와의 갈등처럼 가정적인 요인, 가난이나 실패, 좌절과 같은 사회적 요인에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다. 개인의 성격적인 특성상 속상함, 억울함, 분함, 화남, 증오 등 감정을 쉽게 풀어내지 못하고 담아두면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화병을 겪는 사람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모든 면에서 참기를 반복하고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특히 위계질서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기 어렵고 윗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려워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하지 못한다. 또한 가까운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는 내 뜻을 다 이해해주고 알아서 해주리라 믿고 싶어진다. 이러한 환경에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고, 화가 나도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며 감정을 억압하고 억제하다 보니 이런 원인들이 이른바 '한(恨)'으로 남아 결국'화(禍)'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화병은 가장 먼저 정신적인 증상이 나타난다. 최경숙 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환자 대부분이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신경질을 내는 등 예민한 상태가 지속되고, 분노와 화를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억울함과 분한 감정을 자주 느끼며 공격적인 성향이 매우 강해진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불면증을 겪게 되기도 하고, 이유없는 한숨이 늘고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신체적인 증상은 온 몸에 열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목이나 가슴이 조여와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속이 쓰리며 메스꺼움을 느끼고, 이로 인해 식욕장애나 소화장애를 겪기도 한다. 심하게는 만성적인 분노로 인한 심장질환 발병 혹은 악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이 같은 신체적 증상은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 흥분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증상, 즉 마음의 불편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화병으로 인한 증상이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하게 만들고, 이 때문에 불안을 느끼다 보면 더욱 악화될 수 있어 총체적인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이다.
화병을 막으려면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방법을 익혀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줘야 한다. 또 화가 난다고 해서 그 즉시 화를 낸다면 더욱 악화된다. 마치 불발탄을 해체하듯이 천천히 침착하게 화를 다스리며 풀어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혹은 가족의 도움으로도 풀기 쉽지 않은 경우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간단한 체조나 심호흡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도 좋다.
스트레스 해소 역시 화병예방에 중요한데,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경직된 채 수면을 취하면 화병 뿐만 아니라 인체의 모든 면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날 받은 스트레스는 그날 해소할 수 있도록 운동이나 음악감상 등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된다.
화병 치료는 일반적으로 항우울제나 항불안제와 같은 정신과적 약물 및 정신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김종우 교수는"화병은 누구나 한번쯤 가질 수 있는 가벼운 질환으로 생각하여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다”며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증상 발견시 빠른 시일내에 전문의를 찾아 상담하고, 이를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간혹 심장질환을 화병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김경희 세종병원 심장내과 과장은 "여성 심장질환자는 남성과 다르게 가슴통증과 같이 전형적인 심장질환 증상이 아닌,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되는 듯한 비전형적인 증상으로 나타나 단순한 '화병'으로 오인하기 쉽다”며"여성은 폐경이 지나면 남성보다 심장질환 발생률이 높지만 증상이 애매모호해 진단과 치료가 늦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의 심장 크기는 남성의 90%쯤 되고, 관상동맥의 지름도 여성이 2.5~3.0 mm로 남성(3.0~3.5mm)에 비해 약 0.5mm 좁다. 따라서 폐경 후 콜레스테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 혈관의 막히는 속도가 남성보다 빠를 수있어 화병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그냥 넘어가선 안된다.
[이병문 의료전문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