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미국 반도체 기술업체인 램버스와의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지난해 말 갱신하면서 4억달러대의 특허사용료를 절감하게 된 배경에 전자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한 때 '특허괴물'로 꼽혔던 램버스로부터 과거에 과다 지불한 로열티를 사실상 되돌려받는 성과를 거둔건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삼성과 램버스의 이번 협상으로 SK하이닉스 등 다른 반도체업체들도 특허료 부담을 한층 낮출 수 있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이번 협상을 주도한 삼성전자 지적재산권(IP)센터 관계자와 특허업계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0년 초 램버스와 특허 소송을 끝내는 대가로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이 때 삼성전자는 램버스에 선급금 2억달러를 내고 분기당 2500만달러의 특허사용료를 5년간 지급하기로 했다. 5년간 총 7억달러 규모다. 여기다 램버스 지분 8%를 총 2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하면서 삼성전자의 램버스 관련 지출은 9억달러까지 늘어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조건은 SK하이닉스 등 다른 반도체업체가 램버스에 지불하는 특허사용료에 비해 과다하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급기야 SK하이닉스가 램버스에 분기당 1200만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의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지난해 6월 전해지면서 삼성전자 측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삼성그룹 최고위층까지 나서 이 부분에 대한 시정을 삼성전자 실무진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IP센터는 타 경쟁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지불한 특허사용료를 되돌려받을 길이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램버스와 재협상에 나섰다. 램버스와의 이전 계약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간 유효하지만 이보다 1년 앞당겨 재협상에 돌입한 셈이다.
특허업계 고위 관계자는 "타사가 우리 회사보다 유리한 조건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할 경우 보다 나은 조건을 적용받을 수 있다는 일종의 '최혜국 대우 조항'이 있으면 환급도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삼성전자는 램버스와 2010년 계약을 맺을 때 최혜국 조항을 넣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특허료 환급의 가능성은 더 멀어보였다. 하지만 삼성전자 측은 포기하지 않고 램버스와 재협상에 나서면서 우호 관계의 장기적 유지와 윈윈 협력방안을 거론했고 램버스도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협상에 참여한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삼성 측이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 램버스에 지불한 특허사용료가 4억달러에 달하고 선급금으로 지급한게 2억달러니까 총 6억달러를 지금까지 램버스에 지불했지만 이 중 대부분의 금액인 4억달러 초반대의 돈을 돌려받는 성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를 현금으로 되돌려받는게 아니라 '삼성이 램버스에 향후 내야할 특허사용료를 깎아주는' 방식으로 환급 효과를 내기로 합의했다.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삼성전자가 램버스로부터 4억달러대의 신용(Credit)을 확보했다는 표현을 쓴다"며 "이를 5년에 걸쳐 소진하느냐, 10년을 적용하느냐를 놓고 양사가 협의한 끝에 10년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한 2014년까지 유효한 종전 계약을 1년 빨리 접고 2014년부터 5년간 분기당 1500만달러의 로열티를 삼성전자가 램버스에 지불하는 것으로 했다. 2019~2023년까지 후반 5년에 지급할 금액은 시장 상황을 고려해 다시 조정할 방침이다.
만약 이러한 '환급 효과'가 없었으면 삼성은 램버스에 얼마 만큼의 특허사용료를 지불해야 했을까. 삼성 측은 "분기당 3000만달러 안팎의 금액이 됐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른 반도체업체가 램버스 보유 특허를 사용하는 댓가로 지불하는 특허사용료는 대개 그 업체의 매출과 시장 점유율에 비례한다. 해당 기술을 사용해 더 많은 물건을 팔수록 로열티를 많이 지불하는건 당연한 논리다.
2012년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35.4%, SK하이닉스가 16.6%에 달했다. 지난해 6월 램버스와 계약을 맺은 SK하이닉스가 분기당 1200만달러를 낸다면 삼성전자는 이 보다 2배 이상의 특허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램버스 보유 특허 중 비메모리 부문도 포괄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램버스의 보유 특허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고 해도 4억달러대의 환급 효과를 거두는 '신용'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분기당 1500만달러라는 금액 책정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램버스 협상의 이면에는 삼성전자의 강력한 '바게닝 파워'가 작용했다는게 전자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1위를 넘어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빠른 성장을 거듭하는 글로벌 반도체 강자다. 삼성전자가 램버스 특허를 장기간 활용할 경우 램버스의 보유 특허 가치가 제고될 수밖에 없다. 삼성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력을 감안해도 삼성의 반도체 시장 지배력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여러 경쟁업체의 특허소송 공세에 시달리면서 로열티 리스크에 시달려온 삼성이지만 빈번한 소송과 협상을 겪으면서 다양한 협상 노하우를 축적하고 유리한 조건을 도출할 수 있게 된건 긍정적이라는게 전자업계의 평가다.
[황인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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