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시장과 창동 그리고 산복도로
마산이라는 곳, 지금은 창원이 되어버린 도시. 이곳에는 싱싱한 수산물로 가득한 어시장과 한때 서울 명동에 버금가게 북적였던 창동이라는 번화가가 있다.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을 모아 둔 미술관도 있고 예쁜 벽화가 그려진 골목도 있다. 옛 항구도시 마산으로 떠나는 겨울 여행을 소개한다.
마산에 다녀왔다. 마산이라고 하니 이상하다. 이제는 창원이 되었으니까. 마산이라는 도시는 사라졌다. 2010년 진해와 함께 창원시로 통합됐다. 지금은 마산시가 아니라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라는 행정구역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래도 내게 마산은 창원이 아니라 여전히 마산이다. 마산은 내 이십 대를 보낸 곳이다.
옛 마산의 번영을 느낄 수 있는 곳
마산에 참 오랜만에 갔다. 마산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어시장으로 갔다.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마산에서는 삼겹살보다 회가 쌌다. 가난한 청춘인 나와 친구들은 삼겹살 사 먹을 돈이 없어 회를 먹었다. 어시장 난전에서 가장 싼 회 ‘한 사라’를 시키고 지금은 좋은데이 소주로 유명한 무학 소주를 나눠 마셨다. 주인아주머니는 가끔 전어회를 서비스로 내주기도 했다. 밑반찬은 오이와 당근 몇 조각이 전부였다. 우리는 쌈장과 초장을 섞은 장에 향미유를 잔뜩 뿌리고 회를 푹푹 찍어 먹었다.(1번째 사진)마산 앞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이 모이는 마산 어시장. (2, 3번째 사진)창동 골목 곳곳에는 작은 공방과 전시장이 들어서 있다.
- “산복도로의 월세 5만 원짜리 방에서 자취를 했다. 마당에는 커다란 목련 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그 아래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귀퉁이에는 펌프가 있었다. 평상에 앉으면 멀리 바다가 보였는데 그 바다 위에는 커다란 컨테이너선들이 해무에 싸여 신기루처럼 떠 있었다.
- 나는 평상에 앉아 수동 타자기의 글자판을 꾹꾹 누르며 시를 썼다. 시가 써지지 않으면 펌프로 찬물을 받아 마셨다. 봄에는 목련 꽃잎이 평상 위에 낭자했고 여름에는 비릿한 바다 향이 희미하게 밀려들었다.“
마산은 쇠락했지만 어시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마산어시장은 동성동과 남성동, 신포동 일원에 위치하는데, 점포 수만 1만 2,000개에 달한다. 매일 아침이면 마산 앞바다와 통영, 거제 등지에서 갓 잡아온 횟감과 각종 해산물이 몰려들고 시장은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로 붐빈다. 갈치와 고등어, 문어, 아귀 등이 점포마다 가득하다. 떠들썩한 어시장을 걷다 보면 여기는 창원이 아니라 마산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새벽에는 경매도 볼 수 있다.
(위로부터)젊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 놓은 창동, 이선관 시인 기념관
어시장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창동이다. 마산 창동은 한때 경남에서 상권이 가장 번성했던 곳이었다. ‘서울엔 명동, 마산엔 창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아직도 마산 사람들은 “90년대만 해도 마산 창동이 명동 다음으로 땅값이 비쌌다”고 말하며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곤 한다.창동에는 학문당 서점이 있었다. 지금 사라진 서울의 ‘종로서적’과 같은 역할을 했다. 약속 장소를 잡을 땐 언제나 “학문당 서점 앞”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면 친구와 선배, 후배 대여섯 명은 꼭 만났던 것 같다. 거리는 레스토랑과 카페, 최신 유행의 옷 가게가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학문당 앞에서 모이면 우리는 근처 카페로 가 커피를 마셨고, 카페를 나와서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통술집 골목과 아귀찜 거리도 붙어 있었는데, 그 골목은 아저씨들의 구역이었다.
통영에 다찌집이 있고 사천에 실비집이 있다면 마산에는 통술집이 있다. 술값에 안줏값이 포함되어 있다. 술을 시키면 안주 서너 가지가 함께 따라 나온다. 처음에는 해초와 생선이 나오고 나중으로 갈수록 수육이나 삼계탕 같은 ‘발 달린 고기’가 나온다. 요즘은 불황이라 그런지 술값을 싸게 받고 안주도 반만 내는 ‘반(半)통술집’이 있다고 한다.
화려하게 칠해진 골목을 걷는 재미가 있는 창동
창동 거리는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1960~90년대가 창동을 중심으로 한 마산 원도심의 전성기였는데, 마산수출자유지역이 문을 열고 한일합섬 마산공장이 들어서면서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몰려들 때였다. 그야말로 눈부신 호황이었다. 돈이 넘쳐났고 거리는 쇼핑백을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하지만 90년대 후반 들어 공장이 중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쇠퇴의 조짐을 보였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신도시인 창원이 인구를 빼앗아 갔고 창동 주변에 들어선 대형백화점도 상권 붕괴를 가속화했다. 시민극장, 강남극장 등 주변의 극장이 문을 닫은 것도 한몫 거들었다. 젊은이들에게 문화와 낭만의 거리였던 창동은 생기를 잃고 아사 직전 상태로 남았다.
가고파꼬부랑길벽화마을
창동 상권이 그나마 회복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진 건 2011년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급격하게 감소한 원도심권 인구 유입을 회복하고 노후화된 상권을 재생시키기 위한 사업으로 정부와 창원시가 540여 억 원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창원시는 60여 개 빈 점포에 예술인들을 무상으로 입주시켰고 그들이 작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후 2013년 ‘창동예술촌’이란 간판을 달았다. 예술촌 골목을 걷다 보면 이들이 그린 벽화와 다양한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각종 공방과 아틀리에도 자리하는데 유리창 너머로 이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좁게 난 골목을 파고들다 보면 하얀 외관이 인상적인 창동아트센터가 있고 맞은편에는 작은 전시관 하나가 있는데, 고(故)이선관(1942~2005) 시인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공간이다. 뇌성마비로 평생 육체적 장애를 안고 살았던 시인은 자신의 장애를 시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첫 시집 ‘기형의 노래’를 시작으로 민주, 생태, 통일을 이야기한 시인은 ‘마산, 그 창동의 허새비’라는 시를 통해 고향 마산과 창동을 죽어서도 영원히 사랑하리라고 노래한다. 그에게 창작의 현장이었던 창동 골목 한편에는 유품을 볼 수 있는 전시관과 소박한 시비가 자리한다.
맛있는 걸 먹고 나면 도시가 달리 보인다
(위) 창동분식의 냄비우동과 김밥. 박고지(여물지 아니한 박의 속을 파내어 말린 반찬)를 넣어 만든 김밥을 이 집만의 비법으로 만든 겨자소스에 찍어 먹는다. (아래) 운지식당의 생선국
걷다 보니 배가 고파진다. 창동에는 먹을 만한 곳이 많다. 대부분 오래된 노포다. 어디를 갈까. 이런 날에는 ‘만미정’의 돌우동이 곧바로 떠오른다. 돌솥에 담겨 나오는 우동을 먹으면 몸도 마음도 따스하게 데워지는 것 같다. 김초밥도 맛있다. 복국 거리로 가서 복국을 먹을까? 마산 사람들은 복지리보다 복매운탕을 좋아한다. 시큼한 식초 맛이 강하게 올라오는데, 이게 한 번 맛보면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 나중에는 매운탕만 찾게 된다.아니다. 어시장으로 가 생선국을 먹자. 어시장 주변에는 생선국을 잘하는 식당이 많다. 마산, 부산에서는 생선으로 국을 많이 끓여 먹었다. 그만큼 흔했고 또 싱싱했다. 서울 사람들은 갈치국을 제주도 음식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자주 우리네 식탁에 올랐다. 애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넣고 마늘 간만 해서 시원하게 먹었다.
여기까지 와서 우동을 먹으려니 뭔가 아쉬워서 생선국을 먹기로 했다. 갖가지 반찬과 함께 오른 생선국은 매콤했고 감칠맛이 좋았다. 국그릇 속에는 가자미와 장대가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생선국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마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 풍경이 아무리 스산하고 별로 볼 게 없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그 도시가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여행의 속성이다.
(위)화려하게 칠해진 골목을 걷는 재미가 있는 창동 (아래)가고파꼬부랑길벽화마을에 그려진 벽화
동화 같은 골목을 산책하다
창동에서 나와 산복도로에 가봤다. 슬레이트 지붕을 인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그곳에 모여 자취를 했다. 성호동과 추산동 일대다. 14번 시내버스가 가쁜 엔진 소리를 내뱉으며 좁은 도로를 힘겹게 다니곤 했다. 이곳에 ‘가고파꼬부랑길벽화마을’이 있다. 전국 여느 달동네가 그렇듯 이곳에도 벽화가 그려졌다. 마을 입구에는 연탄집게 그림과 할아버지가 손녀를 꼭 끌어안아 주고 있는 그림, ‘청수탕’이라는 목욕탕 앞에서 할머니와 엄마, 손녀가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이 있다.그림 속 할머니는 손녀의 목욕비를 아끼기 위해 손녀 나이를 7살이라고 우기고 있고, 목욕탕 카운터 유리문으로 고개를 내민 주인 아주머니는 인상을 쓰고 있는 모양새다. 당시 목욕탕에서는 8살부터 어른 요금을 받았다. 마을을 올라가는 계단은 모두 세 곳이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어린 시절 학교에서 두드리던 실로폰 같다. 벽화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우울했던 기분이 스르륵 풀리는 것 같다.
(위)행복 버스 벽화 (아래)벽화를 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한 창동
이곳은 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규모의 마을로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인데, 2013년 경남은행이 지원해 벽화마을로 꾸미는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했다. 경남도미술협회 소속 미술작가 32명이 재능을 기부해 벽화를 그려 넣었다. 산동네라 경사가 있는 길과 계단길이 조금 있지만 걷기에 힘든 정도는 아니다. 벽화 대부분은 호랑이와 꽃 등을 소재로 그렸다. 그래서인지 걷다 보면 동화책 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만화 캐릭터가 볼일을 보고 있는 그림 앞에서는 슬며시 미소가 피어 오른다. 당시 이곳에는 화장실이 집 외부에 따로 있었다. 사람들은 이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어두컴컴한 밤이나 비 오는 날에는 볼일을 보는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행복버스’라는 벽화도 있는데, 기다란 분홍색 버스 안에 털보 운전사와 강아지, 아이들이 타고 있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날개 벽화도 인상 깊은데,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꼭 사진을 찍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고파꼬부랑길벽화마을 입구
골목은 어지럽고 복잡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다정한 풍경들이 참 많다. 전봇대에는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아달라는 전단지가 바람에 날리고, 시멘트 담벼락에는 ‘철수는 영희를 좋아한다’ 식의 ‘정겨운’ 낙서가 쓰여 있다. 길과 길이 만나는 조그마한 공터에는 손바닥만한 텃밭을 마련해 푸성귀를 심어놓기도 했다. 모퉁이를 돌아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과 푸짐한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아주머니의 넉넉한 모습도 만날 수 있다.해 질 무렵이면 담 너머로 구수한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퍼지고 골목길에는 교회 종소리가 내려앉겠지.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을 꼭대기에 다다른다. 멀리 마산항이 내려다보인다. 마을은 마산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바닷가에는 어느새 높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마을의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과 선연하게 비교되는 풍경이다. 삼십 분쯤 골목을 돌아보고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다정하고 따뜻한 동화책 한 권을 펼쳐본 기분이다. 다음에는 아이와 함께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산이 낳은 조각의 거장
세계적인 거장인 문신의 작품을 모아놓은 문신기념관
마을 옆에는 창원시립문신미술관이 있다. 마산이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1923~1995)의 작품을 모아 놓은 곳이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신은 20세기 조각의 거장으로 불린다. 1960~70년대 프랑스 파리를 주 무대로 왕성하게 활동한 그는 대칭의 미를 살려낸 추상조각으로 생명과 우주의 원리를 완성도 높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3대 거장 조각전’에는 영국의 헨리 무어, 미국의 알렉산더 칼더와 함께 초대됐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공로 훈장인 ‘예술문학영주장’을 받기도 했다.미술관에 들어서면 마당에 스테인리스와 청동을 만든 대형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작품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좌우균제(좌우 균형이 주는 조화)의 추상조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보기엔 완벽한 대칭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그는 흑단과 강철, 스테인리스 등을 재료로 작업했는데, 이토록 단단한 재료를 매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집스럽고 치열하게 작업해야만 했을까.
문신기념관에서 바라본 마산 시내와 바다
문신은 1980년에 영구귀국해 마산시 추산동 야트막한 언덕, 고향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돌산을 깎아 미술관을 지었다. 작품을 판 돈은 고스란히 미술관을 짓는 데 사용됐다. ‘문신 25시’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노예처럼 일하며 미술관도 조각 작품을 만들듯 지었다. 재단된 대리석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미술관은 나의 필생의 이력’이라 했다. 아마도 이 미술관이 자신의 최대 작품이 아니었을까.미술관을 만드는 데 꼬박 14년이 걸렸다. 그는 그는 미술관 개관 1주년을 사흘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미망인은 “사랑하는 고향에 미술관을 바치고 싶다”는 문신의 유지를 받들어 2004년 마산시에 미술관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문신미술관에서 오래 시간을 보냈다. 평면작품도 좋지만 입체작품을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왼쪽 첫 번째)문신 동상, (중간)추상적인 미가 돋보이는 문신의 작품 (우)옛 골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고파꼬부랑길벽화마을
작품을 한 바퀴 빙 돌아가며 보다 보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문신의 작품은 상당히 추상적이라 어렵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너무 무리해서 해석하려 하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고 즐기려고 하면 된다. ‘음, 이건 개미를 닮았군.’ ‘이건 계란 두 개를 겹쳐 놓은 것 같은데?’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모양이군’ 하면서 보면 된다는 것이다. 뭐 어떠랴. 여행 일정에 미술관을 넣고 미술관에서 서성이다 나오면 가슴 가득 뭔가 보람이 가득한 기분이 차오른다.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 사실을 새삼 느꼈다. 이번 여행은 추억 방향으로 떠난 여행이었구나. 어시장이며 창동, 산복도로… 누구에게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여행지가 있을 것이다. 겨울에는 그런 여행지로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그 시절 마산으로 돌아가겠어요?”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글쎄요” 하고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여행으로라면 가끔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여행은 내키지 않을 땐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니까.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산 여행 정보
붉은색이 인상적인 콰이강의 다리
마산에는 숨겨진 명소가 있다. 저도에 일명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다. 구산면 구복리와 저도를 연결하는 길이 170미터, 폭 3미터 규모의 붉은색 보행용 다리다. 의창군 시절인 1987년 구산면 육지부와 섬 저도를 연결하기 위해 차량 통행용으로 건설됐는데, 2004년 새로운 다리가 생기면서 사용이 되지 않았다.시는 오래된 다리의 바닥을 일부 걷어내고 투명 강화유리를 깔아 2017년 3월 ‘저도 콰이강의 다리 스카이워크’로 재탄생시켜 관광 명소로 만들었다.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붉은색 교량은 이국적인 느낌으로 가득하다.
복국거리에서 맛본 복 수육
마산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아귀찜이다. 오래전 마산 오동동에서 장어국을 팔던 혹부리 할머니가 어부들이 가져온 아귀를 된장과 고추장, 마늘, 파 등을 섞어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동동 아귀찜 거리에는 30여 개의 음식점이 몰려 있다. 생아귀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쫀득한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진짜초가집은 1965년부터 영업 중이다.복국 거리도 있다. 광포복집, 동경복집 등이 유명하다. 창동분식은 45년 업력의 오래된 분식집이다. 냄비우동과 ‘박고지김밥’으로 유명하다. 박고지를 넣어 만든 김밥을 이 집만의 비법으로 만든 겨자소스에 찍어 먹는다. 어시장에 있는 운지식당은 그날 잡은 생선으로 끓이는 생선국이 맛있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0호(24.12.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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