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보러 다니기 딱 좋은 계절이다. 연중 시티라이프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날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시를 거닐며 시각적으로 즐거운 쾌감을 전해줄, 서울 다양한 곳에서 열리는 3개의 큰 전시와 1개의 작은 무료 전시를 소개한다.
모든 소비가 놀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다. 이 놀이 가운데 ‘전시’는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유명한 어떤 것을 전시해두는 것만큼 시각적이고 동시에 흥미로운 놀이 기능을 제공하는 게 없기에 그렇다. 최근 몇 년을 돌이켜보라.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전시들이 존재했었다. 심지어 새로운 세대들은 구세대의 고상한 취미라 여겨졌던 미술품 관람 및 구입을 일종의 트렌드로 전환시켰다.
미술품을 사고 파는 아트 박람회가 문전 성시를 이루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그래서 어떤 작품 또는 어떤 콘셉트를 보고 즐기는 행동은 이 시대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놀이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 셰일라 힉스 ‘착륙 ATTERRISSAGE’
청담동에는 유명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만든 럭셔리 하우스 브랜드 루이비통의 매장이 있다. 이 건물 4층은 에스파스 루이비통이라 불리는 공간으로 루이비통 재단의 미술 소장품을 기획 전시하는 일종의 갤러리로 종종 사용된다. 최근 에스파스 루이비통에서는 양모 위빙과 자수를 예술로 승화시킨 미국 작가 셰일라 힉스의 작품 3점을 선보이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독특한 텍스타일 아트를 선보여온 그는 이번에는 ‘착륙’이라는 콘셉트 하에 루이비통 재단 소유의 작품 3점을 선보인다. 무료 전시이며, 온라인에서 예약만 하면 된다. 이번 전시는 루이비통 메종 서울에서 열리며, 9월 8일까지 지속된다.
#1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장 초입에 설치된 ‘역행 시계’(dncmr). 스기모토 히로시 신소재연구소 창립자가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설치 작품이다.
‘무준사범(無準師範)의 사찰 현판 글씨 모사본’, 스기모토 히로시, 2022, 개인 소장품
도시 나들이 전시로 가장 먼저 추천하는 건 럭셔리 워치 앤 주얼리 브랜드 까르띠에의 전시다.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 까르띠에는 예술 및 문화적으로 굉장한 헤리티지를 가진 브랜드다. 어쩌면 지금 이야기하는 이 전시는 바로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컬처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번 전시는 2021년에 열릴 계획이었으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금 다시 우리 곁을 찾아왔다. 브랜드 전시라고 해서 상품만 진열, 전시되어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그래서 이 전시가 흥미롭다.전시는 총 3개의 챕터로 되어있다. 소재의 변신과 색채, 형태와 디자인, 범세계적인 호기심이 그 3개의 장이다. 이 콘셉트 하에 장인의 독보적 기술로, 자연과 문화에서 영감을 가져온 디자인으로, 장대한 시간을 걸쳐 탄생한 시계와 주얼리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까르띠에의 제품을 상품화하기 위해 계획되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인류 역사의 유구한 흐름 속에 단지 브랜드의 제품들이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래서 헤리티지를 보유한 제품들은 주제 속 오브제로 기능할 뿐이다.
까르띠에 ‘Mystery Clock’, ‘네크리스’ 까르띠에, 1990, 플래티늄, 화이트 골드, 다이아몬드, 까르띠에 소장품
까르띠에 d’Art 로통드 드 까르띠에 워치, 롱드 루이 까르띠에 워치와 주얼리,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에서 만나는 주얼리 컬렉션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워치 앤 주얼리 브랜드의 거대한 전시를 종종 마주쳐왔다. 최근에 막을 내린 유사한 전시회도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전시들은 브랜드의 우월함을 뽐내려는 목적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에서 그러한 의도는 철저히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의 주최는 까르띠에가 아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전시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상징(이 되어버린)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오픈 10주년이라는 결정적 시간이 함께 하고 있다. 이렇게 의미가 부여된 공간에서 이번 전시를 위해 협업한 이들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해당 전시는 5년 전 동일한 주제로 도쿄에서 열린 바 있는데, 그때 전시 공간 디자인을 맡았던 아티스트 스기모토 히로시와 건축가 사카키다 토모유키가 이끄는 신소재연구소(New Material Laboratory Lab)가 이번에도 참여했다.
동시에 국내 전통문화연구소인 온지음도 전시장을 한국적 소재로 꾸미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처럼 전시는 우리네 역사적 시간이 생성해낸 보석 같은 결정들을 작품화하여 만나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전시는 DDP 아트홀 1, 컨퍼런스홀에서 6월 30일까지 개최된다.
#2 ‘힙노시스: 롱 플레잉 스토리’
‘힙노시스: 롱 플레잉 스토리’
디지털 원주민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대에게 다시 바이닐 레코드 트렌드가 돌아온 건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바이닐을 두고 흔히 우리는 LP라고 칭한다. 혹시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LP는 바이닐 레코드의 한 종류이면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데, 이는 ‘Long playing record’의 약어다.보통 LP는 분당 33회전을 돌면서, 한 면의 러닝타임이 약 25분 정도 된다. 그러니까 앞뒤를 모두 더하면 최장 90분 정도의 음악을 수록할 수 있다. 일반적인 영화 한 편의 길이와 맞먹는다. 이렇게 LP의 어원을 제목으로 한 전시회가 하나 있다. 음악 산업의 황금기 시절, 전설적인 앨범 재킷 디자인을 선보였던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의 전시회다.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가 활동하던 1960~70년대에 그들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직접 사막을 오르고, 바다 한 가운데로 양을 옮겼다. 심지어 몸에 불을 붙이기도 했고, 거대한 돼지 풍선을 하늘에 띄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힙노시스의 걸작 앨범 아트워크에 대한 ‘롱 플레잉(LP)’ 스토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전시화가 바로 ‘힙노시스: 롱 플레잉 스토리’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Wish You Were Here’, 1975,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폴 매카트니 앤 윙스(이하 윙스)Paul McCartney and Wings, ‘Band on the Run’, 1973
윙스Paul McCartney and Wings, ‘Venus and Mars’, 1975, 나이스The Nice, ‘Elegy’, 1971
윙스Paul McCartney and Wings, ‘Venus and Mars’, 1975, 나이스The Nice, ‘Elegy’, 1971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Houses of the Holy’ 1973,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Presence’, 1976,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Scratch’, 1978
이번 전시에서는 힙노시스가 창조했던 실제 바이닐 아트워크 200여 점과 함께, 포토샵 등의 디지털 툴이 전무하던 시절에 만들어낸 전설적 앨범 재킷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 있다. 동시에 힙노시스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오브리 파월이 들려주는 전설과 같은 뮤지션들의 뒷얘기도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핑크 플로이드의 1975년 앨범 [WISH YOU WERE HERE]는 정장을 입은 두 남성이 악수를 하는 장면으로 꾸며져 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뜨거운 화염에 휩싸여 있다.요즘 같으면 합성으로 불을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될 거다. 그런데 1975년엔 사람 몸에 직접 불을 붙였었다. 원시적이지만 이런 노력 끝에 우리가 현재 걸작이라 부르는 앨범 재킷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 중심에 영국의 힙노시스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는 굉장히 시기적절한, 그러면서도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는 트렌드 최전선의 전시회다. 이 흥미로운 전설을 보고 들은 후, 서촌을 거닐다 LP 바에 들러 노래 하나 신청해보길 바란다. 전시는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8월 31일까지 개최된다.
#3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Philippe Parreno(1) 리움미술관 제공 / 사진 김제원 Photo Studio kim je won
휘황찬란한 워치 앤 주얼리가 어떻게 시간 속에 담기는지, 바이닐 레코드의 전설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시를 보았다면, 이제 대 미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작가 필립 파레노를 만날 차례다. 앞의 두 전시와는 또 다른 놀이의 기회를 제공할 본 전시는 완전히 색다른 현대 미술 트렌드를 경험할 수 있다.파레노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다시 결합되는 영역을 탐구하는 작가다. 그는 예술 작품과 전시를 대하는 방식을 실험하면서 시간과 기억, 인식과 경험,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고민하고, 개별 작품을 집결해 선보이는 자리가 아닌 통합적인 경험의 장으로 전시를 제안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 역시 사진, 그래픽, 조각, 영상,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가 한데 어우러지는 거대한 무대 환경을 만들어낸다.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필립 파레노의 이번 전시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수의 목소리(VOICES)다. 이 다수의 목소리는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보이스’는 필립 파레노의 199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모두 만날 수 있는 대규모 개인전이다. 대형 미술관 중 하나인 리움미술관 전체 공간을 사용하기에 대규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공간을 압도하는 새로운 목소리와 전시 자체를 조율하는 인공두뇌가 등장한다. 이 인공지능의 목소리에 한국 배우 배두나가 참여했다. 아마 전시장에 가본다면 이 인공지능이 어떻게 전시 자체를 조율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필립 파레노의 이번 개인전은 현대 미술의 흐름이 어떻게 전환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의 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시를 본 후 서울이란 도시에서 가장 트렌디한 공간 중 하나인 한남동 일대를 즐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은 리움미술관 전체에서 7월 7일까지 둘러 볼 수 있다.
[글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이주영, 리움미술관, 그라운드시소]
[일러스트 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 AI생성]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32호(24.6.04) 기사입니다]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