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난 연말 홀로 올랐던 태국행 밤 비행기 옆자리 중년 남성의 강렬한 첫인상과 반전 매력(?)을 기억합니다. 먼저 앉아있다 공간을 내주던 제게 가볍게 목례한 그는 몸에 꼭 맞는 검은 목폴라에 진한 색 청바지, 단정한 매무새의 머리까지 풍기는 분위기가 참 깔끔했습니다. 앉아서도 꼿꼿한 자세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게 미중년이구나, 정돈된 어른이란 이런 것일까’ 감탄했습니다. 생각을 조금 고쳐먹게 된 건 착석을 마친 그가 돌연 바빠지면서부터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엄지가….
비상시 기내 탈출 요령을 안내 중이던 승무원보다 10배는 분주한 그의 손가락 끝 스마트폰 화면에 비친 건, 인스타그램 뉴스피드였습니다. 언뜻 봐도 화려한 색의 자극적인 문구로 도배된 썸네일의 릴스 (숏 폼 영상 콘텐츠)에 몇 초 시선을 주다 이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고…. 빠른 속도로 스크롤을 내리다가는 종종 혼자 조용한 소리로 웃다 그쳤고, 이어 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지인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륙이 지연되며 흘러간 시간만 수십 분, 이후 출발을 기다리다 잠든 전 그 무한 수직하강 의식이 언제 막을 내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과연 높은 상공에서 데이터 제공이 물리적으로 차단되기 전까지 스스로의 의지로 그 행위를 멈출 수 있었을까요. 자세한 속사정이야 알 순 없겠지만, 내릴 때 본 그는 처음처럼 그리 멋져 보이진 않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중독적 행위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운은 여전하지만, 그를 세기의 유별난 ‘도파민 중독자’라고 볼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저 포함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출근길 버스에서, 퇴근 후 침대에서 꽤 자주 벌이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흔히 자극적인 콘텐츠를 ‘도파민 터진다’, 심심할 땐 ‘도파민을 찾아 헤맨다’고 표현합니다. 바야흐로 도파민의 시대, <도파민네이션>의 저자 스탠퍼드대학교 의과대학의 정신의학·중독의학 교수 애나 렘키는 책을 통해 이같은 ‘디지털 마약’으로 일상을 버텨내는 현대인의 현실을 짚어내며 회복법을 안내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21년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셀러로 선정됐고, 같은 해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논픽션 하드 커버 책 6위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책은 이밖에 실제 '약물' 중독자와 그 재활 과정도 다수 소개하는데, 여기선 디지털 세계를 통한 도파민 중독의 과정과 극복법에 초점을 맞춰 들여다보려 합니다.
◆ 고통과 쾌락을 같은 곳에서 처리하는 뇌… ”올라간 건 반드시 내려와“
도파민은 중추신경계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 어떤 보상을 추구하려는 ‘동기 부여’에 핵심 역할을 담당합니다. 적당한 도파민은 성취감과 즐거움을 유발하고 동기 부여를 강화합니다. 과해서가 문제겠지요. 관련해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핵심 키워드는 ’쾌락‘과 ’고통‘ 2가지로, 재밌는 건 이 둘이 뇌의 같은 곳에서 처리된다는 사실입니다.
저울 이론 (출처=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저자가 소개한 ’저울 이론’에 따르면 쾌락-고통은 한 저울 양끝에 놓인 추와 같습니다. 이 저울은 ’평형 상태’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올라간 건 반드시 내려온다’,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행위로 얻은 쾌락 쪽으로 저울이 기운 후에는 우리 뇌는 반드시 저울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반작용이 저울을 수평으로 돌려놓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쾌락으로 얻은 만큼의 무게는 곧 반대쪽으로 실리고, 무게 추는 이내 고통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절제 없는 쾌락을 추구한 이후 찾아오는 쓰린 고통을 한 번쯤 겪어보셨을 겁니다.
◆ 용이한 접근성과 불확실성의 집합체, 인터넷
기자의 SNS 돋보기 탭
도파민은 중독 가능성 측정의 지표로 쓰입니다. 어떤 약물이나 행위가 도파민을 더 많이, 더 빠르게 분비시킬수록 중독성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지는 건데, 여기에 중독성을 높이는 핵심 요소가 바로 '접근성'입니다. 누워서 엄지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원하는 만큼의 정보와 자극에 무한정 접근할 수 있는 현대사회는 도파민에 얼얼해지기 딱 좋습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이 책의 챕터 이름은 ‘인터넷 : 디지털 약물 주사기'입니다.
SNS의 ’불확실성‘도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책에는 흥미로운 연구가 하나 등장합니다. 도박 상황에서 뇌의 보상경로에 분비되는 도파민 양을 측정해본 결과, 돈을 따거나 잃었을 때보다 ’이기고 질 확률이 같을 때‘ 가장 높았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불확실성이 가장 높을 때입니다. 같은 원리로 소셜 미디어상 도박의 결과만큼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해서 도파민 분비량을 높이는 것이 ’타인의 반응‘입니다. ’좋아요‘나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기 불확실하다는 점이 ’좋아요‘ 그 자체만큼 우리를 흥분시킨다는 설명입니다.
온라인상 접근성 높고 불확실한 자극들은 별 노력 없이도 빠르게 우리를 만족시킵니다. 이런 고도의 도파민 제품은 '만족을 미루는 능력'을 해칩니다. 이는 '지연 가치 폄하'라는 심리 현상을 유발하는데 보상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수록 그 보상 가치를 낮게 보게 되는 겁니다. 즉각적인 값싼 보상에 눈먼 뇌는 인생 전체의 궤도를 생각할 능력을 점점 잃어갑니다.
더 문제는 이런 쾌락 자극에 반복해 노출되면 초기의 ’쾌락’에 실리는 무게는 갈수록 가벼워지는 반면, 이후 반응인 ‘고통’의 무게는 더욱 강하고 길어진다는 점입니다. 내성이 생기는 건데, 이렇게 되면 전과 동일한 효과를 위해선 앞서 선택한 쾌락이 더 많이 필요해집니다. 처음 보는 화려한 춤사위, 자극적인 연예인 가십에 하루종일 시달리던 뇌는 길가에 핀 들꽃을 보고 감동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요?
◆ ‘고통을 마주하는 힘‘이 중요…”운동보다 좋은 알약은 없어“
① 자신을 구속하라
작가는 그 출발점으로 자신의 의지를 믿지 말고, 중독적 요소와 자신 사이의 장벽을 만드는 '자기 구속'을 제시합니다. 책에서는 심한 경우 '중독 요소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쓰레기통마저 버리라'고 단호하게 제언합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중독이 무섭다고 스마트폰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특정 앱 이용 시간에 제한을 둘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이 현실적인 방안일 것입니다. 자신을 구속할수록 도리어 자유로워지는 역설입니다.
② 고통받아라!
저자는 이와 함께 보다 근본적인 도파민 사회 생존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고통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쾌락에 둘러싸여, 받아 마땅한 고통에서 도망가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는 겁니다.
쾌락-고통 저울 (출처=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여기서 또 한 번 '쾌락-고통' 저울의 원리가 등장합니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이 저울의 속성에 따르면 ’고통은 쾌락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쾌락은 고통에 대한 보상‘이기도 합니다. 고통 쪽에 무게를 자주 싣는 인간의 본연의 쾌락 설정값은 점점 쾌락 쪽에 실리고, 시간이 갈수록 고통에 덜 취약해지고 쾌락은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네비아 제공]
'찬물 샤워'가 간헐적 고통을 통한 기분전환의 한 예입니다.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 소름끼치게 차가운 물은 초반엔 통증 자극을 유발하지만, 실험자들은 모두 샤워 후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실제 혈장의 도파민 농도는 샤워 후 250% 증가했고, 샤워가 끝낸 후에도 한 시간 동안 증가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건강상태에 따라 위험할 수 있으니 무작정 따라하는 건 금물입니다.)
런닝 (출처=게티이미지뱅크)
견뎌낸 후에 건강한 쾌락을 건네주는 고통, ’운동‘도 도파민 중독의 가장 강력한 해결책 중 하나로 꼽힙니다. 스탠퍼드 중독치료센터의 소장인 작가는 "운동은 내가 처방할 수 있는 그 어떤 알약보다 기분, 불안, 인지, 활기, 수면에 더 깊고 일관성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신체에 적당한 불편감을 주는 운동은 도파민, 세로토닌, 엔도르핀 등 긍정적인 기분 조절과 관련된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시킵니다. 대단한 운동이 아니더라도 하루에 30분을 걷는 것만으로도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단, 운동도 중독이 될 수 있으니, 뭐든지 적당히 ….
③ 스스로의 약점을 주위에 털어놓아라
저자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불편함도 자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셜 미디어 속 '거짓 자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솔직해지기'가 그 방법입니다. 이런 태도는 처음엔 실행에 옮기기 고통스러우리만큼 어렵지만, 관계의 애착을 강화하고 주변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긍정적 효과를 불러옵니다.
같은 맥락으로 소개하는 것이 '친사회적 수치심' 개념입니다. 수치심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끼는 감정인데, 저자는 자신의 결점을 솔직하게 고백하고도 공감 받고 받아들여질 것을 아는 사회 집단에 속하라고 제안합니다. 알콜 중독자들의 'AA (Alcoholics Anonymous)가 그 예인데, 아이에게는 스스로의 솔직한 모습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정도 그 첫 울타리가 될 수 있습니다.
친밀감은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가 결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더 나아지려고 할 때 생깁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 중독자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멈추거나 줄이고, 동시에 타인과의 친밀감을 늘려갑니다. 깊은 친밀감은 우리 뇌의 내인성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데, 이 도파민은 값싼 쾌락으로 급증하는 도파민과 달리 적응성이 뛰어나고, 활기를 되찾아주며, 건강을 증진한다고 합니다.
◆ "나를 해하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모든 게 범람하는 세상, 고통을 감수하기로 마음먹는 건 당연히 쾌락을 추구하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그 후엔 쾌락이 찾아온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라도…. 길게 이야기했지만 도파민 중독의 해결책, 두 글자로는 '절제'와 '균형'일 것입니다. 단, 쾌락에 내성이 생기듯이 고통에도 내성이 생긴단 점은 우리 뇌의 공평한 부분입니다. 손바닥뿐 아니라 정신에도 굳은살이 생깁니다. 그곳은 언젠가부터 건드려도 더이상 전만큼은 아프지 않습니다.
화면 속 네모난 쾌락 대신 눈앞의 울퉁불퉁한 현실에 몰입할 때 다가오는 신체적·정신적 통증, 그리고 조금 더 천천히 찾아오는 산뜻한 쾌락은 우리를 진짜 삶의 길로 안내해줄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절대 인도해줄 수 없는…. 그러니, 다들 기꺼이 고통받으시길!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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