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드러내야 치유될 수 있다
한국 초연은 2015년, 당시 ‘관객이 뽑은 최고의 초연 연극’으로 선정되었다. 무대에는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하지만 세밀한 심리 묘사와 탄탄한 대본은 두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를 정확하게 관통한다. 객석은 감동으로 폭발한다.이 작품의 극작가 존 마란스. 그는 1978년 21살 때 당시 작사가로서 가수의 느낌을 이해하고자 빈에서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공부했고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다. 그는 “어려서 빈에서 공부할 때 그 도시와 사랑에 빠졌었지만, 동시에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경험했다”고 밝혔다.
‘슬픔과 환희의 하모니’로 수식되는 이 극은 천재 피아니스트 스티븐 호프만과 괴짜 교수 요세프 마슈칸이라는 너무나 다른 두 음악가의 예기치 못한 만남에서 시작된다. 살아온 배경도 예술적 성향도 전혀 다른 두 사람. 각자 삶의 시계가 멈춘 채로 만난 두 사람이 함께 음악을 통해 서로를 들여다보고 아픔을 위로하며 희망을 노래한다.
1986년 봄,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스튜디오 315호. 슬럼프에 빠진 천재 피아니스트 스티븐 호프만은 쉴러 교수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서 온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요세프 마슈칸. 마슈칸은 쉴러 교수를 만나기 전 3개월 동안 자신에게 먼저 노래를 배워야 한다며 스티븐에게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가르친다. ‘아니, 피아니스트에게 노래를 배우라고?’ 8살부터 천재 소리를 들어온 스티븐은 마슈칸의 수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스티븐은 사실 20대가 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나는 피아노 거장들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그러나 마슈칸의 수업은 점점 마법처럼 스티븐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까지 꺼내지 않았던 서로의 상처를 내보이며 치유를 시작한다.
마슈칸과 스티븐의 음악 수업의 중심은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48’이다. 성격은 물론 예술적 성향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지만 음악은 유일하게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매개다. 음악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상처와 아픔을 고백하고, 그 상처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한 사람은 역사 현장에서 유대인으로서 내재된 아픔을 절감하고 다른 이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몇 번의 자살을 시도했었다. 이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피아노이다. 피아노는 두 사람의 소통의 매개체이지 좌절을 맛보게도 하고, 위안을 안기기도 하는 음악을 상징하며 서사를 전달하는 도구이다.
슈만 외에도 베토벤, 바흐, 차이코프스키, 리스트, 슈트라우스 등 위대한 음악가들의 걸작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거장들의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은 서사를 뒷받침하고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슈만이 1840년에 만든 ‘시인의 사랑’은 두 사람의 경험이 투영되면서 작품의 서사를 강화한다. 이 곡은 반주부와 노래가 대화와 대립 구조로 유기적이고 동등한 위치이다. 즉 음악과 가사가 만나 연가곡이 완성되는데, 슬픔을 묻어두고 살아가는 마슈칸과 스티븐이 서로의 아픔과 과거를 이해하고 우정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홀로코스트 등 깊은 고통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삶의 방향성을 잃은 젊은이의 갈등이 접목되며 극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선명해진다. ‘슬픔과 환희가 공존할 때 예술이 완성된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상처는 있지만 그 상처를 싸매는 것보다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며 또한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 음악을 통한 세대를 초월한 우정은 남경읍, 안석환, 서현철의 노련함과 정휘, 홍승안, 곽동연의 신선함의 케미로 구체화된다.
Info
장소: 예스24스테이지
기간: ~2023년 2월19일 티켓 R석 6만 원, S석 4만 원
시간: 화, 목, 금 8시 / 수 4시, 8시 / 토, 일, 공휴일 2시, 6시
출연: 요제프 마슈칸 – 남경읍, 안석환, 서현철 / 스티븐 호프만 – 정휘, 홍승안, 곽동연
[글 김은정(프리랜서) 사진 나인스토리, 파크컴퍼니]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63호 (23.1.1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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