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석보상절’·‘월인석보’가 눈 앞에
‘인왕제색도’ 앞 감상 의자에 앉으면 실제 인왕산 풍경이
28건의 국보와 보물 전시 눈길
‘인왕제색도’ 앞 감상 의자에 앉으면 실제 인왕산 풍경이
28건의 국보와 보물 전시 눈길
이 기사는 기자의 전시 감상을 1인칭 시점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편>
요즘 BTS 콘서트 티케팅보다 어렵다는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 표가 기자 품에 안겼다. 분명 8월 말부터 전시 마감일인 9월 26일까지 ‘매진’이라는 글자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새로 고침을 한 번 눌렀더니 예약이 가능하다는 표시가 떴다. 오후 8시, 취소 표의 행운이 기자에게 찾아왔다. 전시회 입장은 무료. 하지만 코로나19로 제한된 인원만 입장 가능하기 때문에 무료입장으로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다. 이 때문에 중고거래 사이트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입장 티켓이 무려 10만 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예매했다는 후기들을 보면 기자가 갖게 된 입장권은 행운 그 자체였다.
예매에 성공한 화면(왼), 전시 마지막 날인 9월 26일까지 입장권이 매진된 상태(오) /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캡처
전시 당일 도착한 국립중앙박물관은 고요했다. 전시 인원을 제한하고 있기도 했고, 가을장마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이건희 컬렉션’ 전시가 열리는 곳은 상설전시관 서화실Ⅱ. 미리 받은 QR코드 입장권을 제시하고, 공항 검색대와 똑같이 마련된 보안 검색대에서 소지품 검사를 한 뒤 입장할 수 있었다.
1층 입구 기둥에 웅장하게 붙은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 이번 전시회의 공식 이름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이다. 이건희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품목만 21,600점으로, 이 가운데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28건을 포함해 문화재 45건 77점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 관람객을 만났다. 모두 시대와 분야를 대표하는 문화재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서화실Ⅱ 앞, 이건희 컬렉션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 / 사진 = 윤혜주 기자
2만 여점이 넘는 문화재를 한 번에 모두 볼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을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은 2곳인데, 2~3년 전부터 전시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이건희 컬렉션’만을 위한 공간 사용은 불가능하다. 차선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상설전시관 서화실Ⅱ다. 2층 서화실Ⅱ 입구에서 QR코드 입장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플래시를 터뜨릴 수 없고, 재입장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고야 입장할 수 있었다.
국보 제 234호 '묘법연화경 권1-7', 염색한 고급 종이에 금과 은으로 불교 경전 내용을 옮겨 쓴 '사경'. / 사진 = 윤혜주 기자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문화재답게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작품의 실물을 보기 전 맛보기 영상이랄까. 본격적으로 전시장에 들어서니 어둡게 밝기를 낮춘 조명 아래 작품들이 빛나고 있다. 하나같이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들어가자마자 기자를 반긴 건 ‘사경’이다. 사경은 염색한 고급 종이에 금과 은으로 불교 경전 내용을 옮겨 쓴 것이다. 마치 우리가 책을 읽다 좋은 글귀를 만나게 되면 필사를 하며 마음에 새기듯이, 고려시대 사람들은 공덕을 쌓기 위해 ‘사경’을 제작했다. 이번 전시회에 등장한 ‘사경’은 국보 제 234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 권1-7’이다. 지방 행정관리뿐만 아니라 고려 왕실에서도 사경 제작을 후원했는데 ‘묘법연화경 권1-7’은 개인이 후원해 제작된 사경이다. 화려한 꽃무늬로 꾸며진 표지가 멀리서도 눈길을 끌었다.
‘월인석보 권17-18’(왼), ‘석보상절 권11’(오) / 사진 = 윤혜주 기자
그 옆으로는 높이 8.8cm ‘일광삼존상’부터 5등신에 가까운 32.3cm 통일신라 ‘부처’까지 총 6개의 불상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서 있다. 교과서 속에서만 보던 익숙한 문화재가 기자 눈앞에 등장했다. 바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다. ‘석보상절 권11’은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책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ㆍ(아래아), ㅿ(반시옷), ㅸ(여린 비읍) 등 지금은 없어진 한글 발음과 글자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보물 제 523-3호이다. ‘석보상절’과 나란히 빛나고 있던 ‘월인석보 권17-18’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노래 형식으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바라보나 국보 아니면 보물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대부분 작품들이 TV와 책, 교과서에서만 봤던 ‘그 문화재’다. 관람객들이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이 작품이 내 눈앞에? 와...” 라는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번 전시회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았을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확대해 찍은 장면.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놀란 선비가 동자에게 무슨 소니랴고 물으니, 동자가 나무 사이에서 나는 소리라 대답하는 장면. / 사진 = 윤혜주 기자
보물 제 1393호 ‘추성부도’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들 가운데 연도가 확인되는 마지막 작품이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쓸쓸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김홍도의 당시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국보 제 216호 정선의 인왕제색도. / 사진 = 윤혜주 기자
드디어 만난 정선의 ‘인왕제색도’. 사실 그렇게 큰 공간이 아니라서 전시 초입에 들어갔을 때부터 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바로 ‘인왕제색도’ 앞으로 달려가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 원본 작품을 만나기 전에 살짝 설레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인왕제색도’ 앞에 섰을 때는 눈에 너무나 익숙한 작품이라 그런지, 기자가 보고 있는 것이 교과서에 인쇄된 것인지 정말 실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넋 놓고 5분은 바라본 뒤에야 “와 이게 진짜 ‘인왕제색도’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그 앞에 마련된 단 한 개의 의자에 앉아 다시 한 번 의도적으로 넋을 놓았다. 작품 속에 빠져들고 싶었다. 정선이 묘사한 물기 머금은 바위들은 각각의 모양에 따라 ‘범바위’, ‘코끼리바위’, ‘기차바위’ 등으로 불린다. 가을장마가 이어지는 요즘,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과 비슷한 느낌을 뿜을 듯한 현재의 인왕산에서 이 바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시대와 분야를 대표하는 문화재들인 만큼 어느 하나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문화재 하나하나 앞에 서서 오디오 설명을 듣고 설명에 따라 꼼꼼히 살펴봤다. 한 번은 오른쪽 각도에서, 또 한 번은 발꿈치를 세워 위에서, 다 본 뒤에 다시 한 번 뒤돌아서.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왼), '사복사'가 생겨진 향완(오). 모두 고려시대 향로. 향로는 불교의식에서 잡귀나 잡념을 없애려고 향을 피울 때 사용한다 / 사진 = 윤혜주 기자
잡념을 없애주는 것만 같은 고려시대 ‘향로’부터 700년이 지난 지금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수월관음도’까지. 작품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 앞에서 여러 번 넋을 잃었다. 또 오래살고 싶은 옛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십장생도 10폭 병풍’ 앞에서는 그 화려함을 담고 싶어 자연스레 휴대폰 사진기를 켠 내 모습을 발견했다.
'십장생도 10폭 병풍'. 대표적인 십장생 해·산·물·돌·소나무·구름·불로초·거북·학·사슴에 대나무와 복숭아까지 더한 그림 / 사진 = 윤혜주 기자
학창시절 미술 교과를 공부할 때에는, 당장 배우고 있는 문화재가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 외우기 바빴다. 정해진 시험 시간 내에 5개 선택지 가운데 다른 시기에 속하는 문화재 1개를 찾아내야만 내신 성적을 관리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문화재를 그 자체로만 바라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물론 공부를 했기에 익숙할 수 있었던 ‘청동 방울’, ‘청동기’, ‘붉은 간토기 항아리’ 등을 실제로 마주해서 신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국보와 보물로 둘러싸인 기분이 묘했다. 괜히 ‘작지만 강한 전시’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분명 기증품 가운데 극히 일부만 전시된 것임에도 감상평을 남기지 못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2022년도 예산안’에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과 관련, 대국민 공개 전시와 지역 특별전에 25억 원이 배정됐다고 하는데 얼마나 더 많은 교과서 속 작품들이 일반에 공개돼 눈을 사로잡을지 기대된다.
아, 특히 전시회를 나가기 직전에는 우리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줄 ‘까치와 호랑이’ 작품이 마련돼 있으니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이 작품 또한 ‘우리가 봤던’ 바로 그 그림이다.
'까치와 호랑이'. 영물이자 군자의 상징이었던 호랑이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 까치가 함께 그려진 작품. / 사진 = 윤혜주 기자
[윤혜주 디지털뉴스 기자 heyjude@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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