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함에 대한 요구가 고전에까지 팔을 뻗치고 있다. PC는 편견이 섞인 표현과 행동을 자제하자는 사회적 운동으로 1980년대 시작돼 2000년대 들어 강한 지지를 받아 왔다. 본래 현시대 공인과 콘텐츠를 주로 겨냥하던 이 운동이 최근엔 옛 텍스트의 혐오와 차별 정서를 재검증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파급력을 고려했을 때 당연한 움직임이라는 입장과 당대 시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배제된 과격한 흐름이라는 반박이 대립하고 있다.
◆ 느닷없이 일어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재기 열풍
전세계를 강타한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은 때아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사재기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흑인노예제도 미화 논란을 낳는 이 영화를 영원히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확산하면서다. 이달 흑인 시나리오작가 존 리들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공개 비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인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HBO맥스에서 이 영화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고전영화 팬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19일 오후 2시(한국시간) 미국 쇼핑 사이트 아마존 영화·TV 베스트 셀러 부문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인종 차별 요소 때문에 재조명된 과거 작품은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영국 BBC에 따르면 2003년 방영된 TV 코미디 시리즈 '리틀 브리튼'은 넷플릭스, BBC 아이플레이어 등 OTT에서 퇴출됐다. 일부 에피소드에서 백인 출연자가 흑인으로 분장한 것이 문제되면서다. 흑인 이외의 인종이 흑인을 연기하기 위해 분장하는 '블랙페이스'(blackface)는 인종 차별 행위로 간주된다.
클래식 애니메이션도 자유롭지 못하다.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는 소수인종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준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아기 코끼리를 주인공으로 삼은 '덤보'(1941)가 대표적이다. 코끼리 덤보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까마귀떼 대장의 이름을 '짐 크로'라고 설정한 것이다. 짐 크로는 183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끈 흑인 비하 코미디쇼 캐릭터의 명칭이다. 1876년 미국 내 인종간 분리를 합법화한 '흑백 분리법'이 '짐 크로 법'으로 불리기도 했다.
◆ 소설 '운수 좋은 날', 아내 뺨 때리는 김첨지의 폭력성 논란
영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한 장면. 인력거를 끄는 김첨지가 아내를 대하는 폭력적 태도가 요 몇 년 새 논쟁 대상이 됐다. [사진 제공 = 이달투]
페미니즘 역시 고전을 재평가하는 기준으로 빼놓을 수 없다. '007 시리즈'는 본드걸에게 성적인 이미지만을 부각해 소모적으로 활용한다는 지탄을 받아왔다. 문학에서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주인공 김첨지를 그리는 방식이 여성을 향한 왜곡된 시선을 드러낸 것으로 꼬집힌다. 아내에게 욕하고, 아내 뺨을 때리는 남성이 '사랑은 많지만 표현에 서툰 남편'으로 묘사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평가다. 이에 '운발 없는 생' 등 한국 근현대문학을 여성주의 시선으로 다시 본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법원, 영화 '청년경찰' 제작사에 "중국동포에 사과" 권고
조선족 혐오를 키운다고 비판 받은 영화 `청년경찰`의 제작사는 최근 법원에서 중국동포에 대한 사과 권고를 받았다. [사진 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PC의 위세가 고전을 재평가할 정도로 강해지면서, 현대 예술가는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게 됐다. 표현의 자유보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앞선다는 공감대도 확산 중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영화 '청년경찰' 제작사에 '국내 거주 중국동포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데 대해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의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다. 이 작품은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조선족 범죄집단을 소재로 삼아 560여 만 관객을 동월할 정도로 히트했으나, 중국동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키운다는 비평을 들었다.◆ "고전 보전하면서도 이에 대한 비판 함께 하는 태도 중요"
애니미이션 `덤보`는 코끼리 덤보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까마귀떼 대장의 이름을 `짐 크로`라고 설정한 것이 문제 됐다. 디즈니 온라인동영상서비스 디즈니플러스는 이 같은 인종차별 요소를 품은 고전영화에 경고문구를 삽입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월트 디즈니]
다만, 당대 시대 배경을 살피지 않은 채 작품의 퇴출만을 촉구하는 건 문화 아카이브를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도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작품 전체가 아닌 몇 장면만 가지고 평가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이에 고전을 보전하려는 노력과 그 한계를 비판하는 태도를 함께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디즈니의 OTT 디즈니플러스는 일부 애니메이션에서 인종차별 요소를 포함한 장면을 삭제하지 않았다. 대신, '이 프로그램은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적 묘사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경고 문구를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작품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선 지금 어떤 의미를 갖고,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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