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작가 뷰엔 갈루바얀(39)은 7년 동안 일상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2010년 필리핀 국립박물관 연구자로 근무를 시작한 후 시간대별로 하루 일과를 치밀하게 적었다. 박물관 근무 상황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미술 작업 내용까지 적었다. 그렇게 쌓인 기록(아카이브)은 그의 역사가 되면서 사회를 이해하는 토대, 예술 재료가 됐다.
박물관에서 그는 자국 풍경화에 담긴 19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 잔재를 발견한다. 서양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 영향을 받아 하나의 소실점과 지평선을 토대로 그려져 있었다. 이를 비틀고 싶었던 작가는 여러 개 소실점과 지평선을 설정한 풍경화를 실험했다.
블랙 나자렌 축제 영상
아라리오갤러리서울 라이즈호텔의 국내 첫 개인전에서 만난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의 소실점과 지평선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리듯이 소실점과 지평선을 어디에 두는냐에 따라 풍경화도 달라진다"고 말했다.식민지 시대 회화 연구는 필리핀 독립 혁명에 대한 관심으로 확산된다. 1896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무장독립단체 '카티푸난'이 16세기 후반부터 필리핀을 지배한 스페인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했다. 두번째 혁명은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을 틈타 일어났으나 결국 미국 식민지 지배로 이어진다.
필리핀 작가 뷰엔 칼루바얀 해먹 설치 작품 '패션과 혁명:빛과 형제'
작가는 필리핀 혁명사를 담은 레이날도 클레메나 이레토 저서 '패션& 레불루션(Pasyon and revolution·1979년 출간)' 낱장을 잘라서 꼬아 만든 해먹을 전시장에 걸었다. 패션은 필리핀에서 사순절에 영창되는 예수 그리스도 수난시다.작가는 "해먹의 한 줄 한 줄이 다 연결돼 혁명사를 읽을 수 있다"면서 "해먹은 혁명가들의 휴식처이자 올가미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혁명가들이 1896년부터 2년간 투쟁했던 바나하오산은 피난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필리핀 사람들이 성지처럼 자주 찾는 곳이 됐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혁명이 종교화되는 과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해먹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슬아슬한 그물 형태 의자에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미술관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컴포트 존(Comfort zone)'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는 설치물이다.
매년 1월 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예수 성상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종교 축제 '블랙 나자렌(Black Nazarene)'을 담은 대형 영상도 흘러나온다. 예수 성상을 만지려는 군중이 뒤엉켜 축제가 아니라 폭동 같다.
작가는 "성상에 접촉하면 축복을 받는다는게 학습화되고 의식이 되어 매년 축제가 열린다. 우리 몸 자체가 기록의 산물이자 아카이브다. 그림에는 슬픔이 없지만 내 몸 기록에 슬픔이 있어서 감동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고 말했다.
뷰엔 갈루바얀 `Session Hall`(76.2 121.92cm)
그는 동시대 필리핀 사람들의 의식 프레임을 역사 속에서 찾고 싶어 일상을 기록했다고 한다. 청소부처럼 매일 삶을 정리하고 기록해서 전시 제목이 '어느 청소부의 안내-풍경, 뮤지엄, 가정'이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비유한 단어들로 풍경은 자연, 뮤지엄은 사회(기관), 가정은 개인을 의미한다.그가 7년간 일상을 기록한 종이 2000여장 중 320장이 이번 전시장 벽에 빽빽하게 붙어 있다. 집요하게 삶을 기록해 의식에 뿌리 깊게 내린 사회적 관습을 발견한 그는 "기록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제대로 기억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기록하고 정리하면서 분석한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11월 10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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