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아버지가 행방불명된걸로 알고 살았어요. 가끔 빨갱이 그런 말은 들으면서요."
독일인 300여명이 영상 속 문양자 할머니의 비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아버지(문상국, 당시 31세 기자)를 잃은 할머니가 아픈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후퇴하던 국군 헌병과 경찰이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등 7000여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념 갈등과 광기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할머니의 독백이 정윤선 작가의 다큐멘터리 '문영자, 그녀의 이야기'에 저장돼 독일까지 왔다. 지난달 19일 베를린 포츠담광장에 위치한 주독일한국문화원에서 개막한 '프로젝트 온 6 -한반도 분단의 기억' 전시장 벽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동·서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있던 쿨투어포룸의 성 마케우스 교회 앞 광장에 설치된 한석현·김승회 작가의 남북한 예술정원 작품 'Das dritte Land : 제3의 자연'.
이 다큐 외에도 한복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북한 여성이 고층 건물 옥상에서 평양 시내를 내려다보는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중국 사진작가 유양 리우가 지난해 6월과 올해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 회담 당시 북한을 방문해 찍은 작품 'DPRK' 시리즈다. 북한 주민들은 억눌려 사는 줄 알았는데 사진 속 여성은 무척 자유로워보였다. 의외로 고층 빌딩이 많은 평양 시내 모습도 놀라웠다. 새로운 경제개발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북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가 느껴졌다.과거 동·서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있던 쿨투어포룸의 성 마케우스 교회 앞 광장에 설치된 한석현·김승회 작가의 남북한 예술정원 작품 'Das dritte Land : 제3의 자연'. 맞은편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홀이 보인다.
이날 독일 작가 클라우디아 슈미츠는 남북한 경계선 풍경을 영상으로 촬영한 후 한지 조형물과 함께 설치해 한반도의 모습을 몽환적으로 재현했다. 에어컨이 없는데다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관람객들로 '찜통'이 된 전시장에서 독일인들은 정말 한반도 분단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이 곳을 찾은 독일 대학생 토니는 "독일도 한때 분단 경험이 있어서 한국 역사에 깊이 공감했다. 남한과 북한이 남매처럼 미래에 다시 합쳐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5월에는 과거 동·서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있던 쿨투어포룸의 성 마케우스 교회 앞 광장에 한석현·김승회 작가의 남북한 예술정원 작품 'Das dritte Land : 제3의 자연'이 설치됐다. 남북한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을 정원의 산맥으로 형상화하고 한반도에서 자생하며 흰꽃을 피우는 야생화 45종을 심었다. 한여름이 되자 두루미꽃, 들바람꽃, 백작약, 물매화 등이 뽀얀 꽃잎을 드러냈다. 두 작가는 예술과 자연의 힘으로 남과 북의 경계가 사라지는 유토피아적 생태계를 재현했다고 한다. 정원을 거닐며 경계를 극복하는 순간을 만끽하라는게 작품의 메시지다.
그렇다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 30년이 흐른 지금 독일 사람들은 행복할까. 적어도 동독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베를린 방문 직전에 찾은 옛 동독지역인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시에서는 극우 세력인 네오 나치 조직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반난민·반이슬람 정서를 내세운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도 옛 동독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1990년 흡수통일된 후 갑자기 '2등 국민'으로 전락한 동독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 과거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향수가 그 발판이 됐다. 서독지역에 비하면 여전히 임금이나 노동생산성이 20∼30% 떨어진다고 한다.
지난달 19일 독일 베를린 포츠담광장에 위치한 주독일한국문화원에서 개막한 '프로젝트 온 6 -한반도 분단의 기억'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한국전쟁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정윤선 작가의 다큐멘터리 '문영자,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제3의 자연'을 본 후 인근 소니센터 커피숍에 앉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서울에서 여행 온 남학생이 로비에 놓인 피아노로 방탄소년단(BTS) '봄날'을 연주하자 주변에 있던 독일 여학생들이 한국어 가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렇게 K팝은 전세계 청소년들을 하나로 만드는데, 한국 정부는 북한에 온갖 정성을 들이고도 매번 뒤통수를 맞는다. 여름 휴가차 들른 독일에서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베를린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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