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올드 상하이'는 유럽풍 건축물과 백화점, 호텔, 영화관 등이 즐비한 국제 도시였다. 동양과 서양, 전근대와 근대, 식민과 탈식민의 가치들이 부딪히던 퇴폐의 도시. 이 곳에 조선 출신 난민 조덕현이 흘러 들어왔다. 그가 인력거를 끌다 우연히 태운 손님은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김염이었다. 덕분에 영화판에서 일을 얻게 되고, 홍(紅)이라는 연상의 상하이 여성과도 만나게 된다. 모순으로 가득한 거대도시 상하이를 이해하는 문이 그녀를 통해 비로소 열린다.
조덕현 이화여대 미술학부 교수(61)가 PKM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 '에픽 상하이'에서는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조덕현의 삶을 만날 수 있다. 2015년 일민미술관 개인전 '꿈'에서 동명이인 배우 조덕현을 수소문해 만나 가상의 조덕현의 삶을 그림으로 그렸던 그다. 내친김에, 1914년생 조덕현의 과거와도 만나기로 했다. 회화와 사진, 영상 등 18점의 작품을 통해 낯선 공간으로 초대하는 이른바 '프리퀄' 전시다. 17일 만난 작가는 "조덕현이란 사람의 서사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싶었다. 문학작품처럼 완성된 것도 아니고 그의 삶의 뼈대만 보여주고 보는 이들이 그 삶을 상상하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935'
오래된 흑백사진을 대형캔버스 위에 옮기는 회화연작을 통해 역사와 삶의 흔적을 탐구해온 작가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또 하나의 드라마 같은 삶의 풍경을 펼쳐보인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건 폭 5.8m, 높이 3.9m의 초대형 작품 '1935'다. 사진처럼 극도로 세밀한 표현은 종이에 연필로 그려 가능했다. 영화 촬영이 한참인 듯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분주하고, 여배우는 말을 타고 조명의 세례를 받고 있다. 옥상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는 사람이 영화배우 조덕현이다. 맞은 편 '상하이 삼면화'에도 양복을 차려 입은 조덕현이 등장한다. 1층으로 들어서는 짧은 머리 여성이 홍이다.작가는 "이전에는 옛 사진을 찾아 그 사진의 오라를 기반으로 그리는 작업을 했다면, 지금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실과 비사실의 혼합으로 사실 이상을 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라고 설명했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연상시키는 초대형 회화 '꿈꿈'은 마치 지옥도(地獄道) 같다. 무너진 건물, 죽은 아이를 안은 남자, 울부 짓는 사람들…. 시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2차 대전의 난민도, 시리아의 난민도 모두 들어있다. 지난 한 세기의 역사를 그림 속에 넣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동경해온 17~8세기의 거대한 역사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다양한 시공간을 압축시키는 더 진화된 작업을 하고 싶었다는 것. "미술사에서 이미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지만, 기존의 역사화가 갖는 힘과 감동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덕현의 작품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다. 그림에서는 숨어 있는 조덕현과 홍을 찾아야 하고, 별관에 전시된 '미드나잇 상하이' 와 '메타포' 시리즈에는 상하이의 풍경이 허구와 실제가 섞여 표현됐다. 당나라 한시나 당대의 가요 등도 간판 사이에 슬쩍 들어가 있다. 작가는 "많은 상징과 은유가 숨어있다. 가급적 많이 찾아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면서 작품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2년 전 탄생시킨 조덕현은 험난한 20세기의 격랑을 헤치며 살다 1995년 고독사한 것으로 설정됐다. 하지만 화가의 붓이 그려낸 그의 젊은 날은 여전히 '화양연화(花樣年華)'다. 전시를 보고 있으니 마치 장자의 꿈처럼, 작가가 꿈에서 상하이의 조덕현이 된 것인지, 조덕현이 꿈에서 작가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시는 2월 20일까지.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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