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김애란·극단 놀땅·서울연극제 등 지원 대상에 포함
문예위 "추첨된 심사위원이 원칙대로 심의…블랙·화이트리스트 고려 불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의혹들의 진상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지원이 중단됐던 예술가나 단체들이 하나둘 복권되고 축소·폐지됐던 지원사업이 복구되고 있습니다.
13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따르면 '블랙리스트 1호'로 불리는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쓴 희곡 '꽃을 바치는 시간'이 '2017~18년 오페라창작산실-오페라창작활동발굴지원' 1·2차 심의를 통과해 2천만원의 지원을 받아 오페라 작품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세 작품이 지원을 받았는데, 내년 3~4월께 완성된 작품과 30분 분량의 쇼케이스 실연 심사를 거쳐 최종 지원작으로 선정되면 1억5천~2억8천만 원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극장에서 상연됩니다.
이윤택은 연출 인생 30년을 맞은 연극계 대부로 2012년 대통령선거 때 문재인 후보 지지 발언을 한 것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지목돼 2014년부터 각종 정부 지원사업에서 배제됐습니다.
신라 향가인 '헌화가'를 모티브로 한 '꽃을 바치는 시간'은 2015년 문예위의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사업 희곡 분야 1순위로 뽑혔다가 탈락했습니다.
최근 문예위의 '2017 공연예술 창작산실' 지원작으로 선정된 22개 신작 공연에는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지원을 받지 못했던 극단 하땅세, 놀땅, 백수광부의 작품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특히 놀땅의 연극 '선을 넘는 자들'은 지난해 탈락했던 작품인데 이번에는 선정됐습니다.
'공연예술 창작산실'은 2015년 지원작으로 선정된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연출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대한 지원을 취소하도록 문화체육관광부 지시를 받은 문예위가 심의위원들을 압박한 사실이 드러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도화선이 됐던 사업입니다.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각종 지원에서 배제됐던 문인들에 대한 지원도 재개되는 모습입니다.
지난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스탄불국제도서전에 참가한 한국 작가 6명 중에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시인 안도현, 천양희, 소설가 김애란 등이 포함됐습니다.
특히 김애란은 한국문학번역원에 의해 2015년 11월 미국 듀크대학에서 열린 북미 한국문학회의 초청 사업에서 배제된 사실이, 최근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조사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번에 김애란을 비롯한 문인들을 이스탄불국제도서전에 초청한 기관도 한국문학번역원입니다.
정부의 눈 밖에 나 사업 자체가 아예 폐지됐던 문화예술지원사업들도 최근 부활했습니다.
문예지는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재능 있는 차세대 작가들을 키워내는 작가의 산실이라는 사명감 때문에 운영하는 단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2015년부터 정부 지원이 끊기다시피 하면서 휴간·폐간하는 문예지가 속출했습니다.
새 정부 출범 후 문체부는 5억원의 국민체육진흥기금을 투입해 '우수문예지 발간지원 사업'을 근 2년 만에 되살렸습니다. 내년에는 예전대로 10억원의 지원예산이 편성돼 원상 복구됩니다.
문예위가 얼마 전 발표한 지원 대상 문예지 33개 가운데는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을 등단시킨 '문학과사회'를 비롯해 '시작', '문학의오늘', '베개', '젤리와 만년필' 등이 포함됐다. 이들 문예지에는 기고한 문인들에게 지급하는 원고료 지원금으로 600만~2천300만 원이 지원됩니다.
이런 가운데 장애인 문예지 '솟대문학'이 재정난으로 2015년 폐간된 지 2년 만인 지난달 새로운 장애인문학 전문지 '솟대평론'이 창간됐습니다.
작품 공모를 통해 1천만원씩의 창작 지원금을 주는 '아르코문학창작기금'도 지난해부터 3억원으로 줄었던 예산이 내년부터는 다시 10억원으로 늘어납니다.
소규모 극단들의 활동 무대인 소극장을 지원하는 사업도 지난해 폐지됐다 올 7월 '특성화극장 지원사업'으로 부활했습니다. 학전블루, 30 스튜디오, 포스트극장 등 전국 26개 극장이 지원 대상에 선정됐습니다.
공연예술단체들에 공연 제작비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관료 일부를 지원하는 '공연장 대관료 지원사업'도 되살아났습니다. 올해는 15억원의 체육기금이 투입됐으나 내년은 33억원의 정식 지원예산이 편성됐습니다.
1977년부터 공연장 대관 지원을 받아오다 2015년 대관 공모에 탈락해 블랙리스트 피해 사례로 꼽혔던 서울연극협회의 '서울연극제'는 올 연초 지원대상으로 선정됐습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지원이 끊겼던 윤이상평화재단의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서울연극제와 함께 '지역대표공연예술제' 지원사업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블랙리스트 논란이 심했던 출판지원사업도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지난 7월 발표한 올 상반기 세종도서 790종에는 종전 같으면 '문제도서'로 분류돼 배제됐을 '윤이상 평전'과 세월호 참사를 다룬 책,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작가의 책들이 다수 포함됐습니다.
세종도서는 정부가 전국 공공도서관 등에 비치할 우수 도서를 선정해 종당 1천만원 이내로 구매해주는 대표적인 출판지원사업입니다. 다음 달은 하반기 세종도서 470종이 발표됩니다.
이처럼 달라진 문화예술계 풍경은 블랙리스트 집행기관이란 오명을 썼던 문체부와 산하 문화예술지원기관들의 뼈아픈 자성과 쇄신, 지원심의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문예위는 올해부터 지원 대상을 정하기 위한 분야별 심의위원회를 구성할 때 1천명 가까운 후보자 풀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심의위원을 선발하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출판진흥원도 올 상반기 세종도서 선정 때부터 학술단체와 학회 추천을 받아 분과별로 구성한 3~5배수의 후보군에서 추첨으로 심사위원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블랙리스트를 낳은 정치적 간섭과 검열을 차단하기 위한 일차적인 조치입니다. 문예위는 최근 지원작을 공개한 '공연예술 창작산실'을 포함해 올 들어 진행한 예술 분야별 지원사업 심사에서는 작품 이외의 어떤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는 입장입니다. 블랙리스트 피해 예술가나 작품이 우대받을 수 있다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우려에도 선을 그었습니다.
문예위 관계자는 "추첨으로 선발된 심사위원이 원칙대로 작품만 보고 심사하기 때문에 블랙리스트든 화이트리스트든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며 "올해 지원사업 공모에서 떨어진 후보작 중에는 과거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봤던 예술가들의 작품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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