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신작 열 편보다 재개봉 걸작 한 편이 낫다, 라는 말은 최근 영화시장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표현이다. 지난달 치러진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작들도 거의 다 개봉했고, 또 다른 신작들을 찾자니 잘 만든 영화들이 거의 안 보인다. 잠시 극장은 접고 나들이라도 가야하나. 아직 단념하긴 이르다. 미세먼지 농도가 심해지는 이때, 영화광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걸작들이 줄줄이 재개봉 했다.
우선 지난 8일 재개봉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달러 베이비'(2004). 서부극의 사나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이자, 감독으로서도 거장 반열에 오른 이스트우드의 25번째 장편영화다. 이스트우드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긴 영화로, 딸에게 외면받으며 외롭게 살던 권투 트레이너 프랭키 던(이스트우드)과 자신에게 찾아와 어느덧 딸처럼 여기게 된 여성 선수 매기 피츠제랄드(힐러리 스왱크)의 이야기를 그린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프랭키가 병실에 누워있는 매기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병실 밖을 나설 때다. 프랭키는 누워 있는 매기에게 읊조리듯 말한다. "모쿠슈라는 소중한 내 혈육이란 뜻이란다." 몇 번의 자살을 기도하며 거의 의식불명상태로 있던 매기는 이 말을 듣고 프랭키를 향해 마지막 미소를 짓는다. 단순히 권투와 안락사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다. 그것을 소재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존재를 두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지에 대한 과정을 매우 섬세하게 풀어낸다.
같은 날(8일) 재개봉 한 리들리 스콧의 페미니즘 로드무비 '델마와 루이스'(1991)도 주목할 만하다. 난봉꾼 남편에게 주눅들며 사는 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과거 강간 피해의 기억으로 세상에 냉소적이게 된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잔 서랜든)가 주말여행을 떠나며 부딪치는 이야기를 그린다.
평화로워 보이던 여행은 델마가 한 사내에게서 강간 위협에 놓이고, 그 장면을 목격한 루이스가 사내를 총살하면서 본궤도에 오른다. 법망을 피해 달아나는 두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특히나 어수룩하던 델마가 점차 당당히 세상에 맞서게 되는 모습이 사뭇 감동적이다. 20대 꽃미남 시절의 브래드 피트를 볼 수 있는 영화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로드무비를 여성화했다는 점에서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기억된다.
9일 재개봉한 질 미무니 감독의 1996년작 '라빠르망'도 기대를 모은다. 20년 전 이 영화를 본 비디오테이프 세대의 상당수가 파리에 대한 열병을 앓았던 바. 영화는 사랑의 외피를 두르지만 본격 스릴러물로서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교차 편집한다. 감독이 흩뿌려 놓은 조각들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타일을 닮아 있다. 아름다운 파리에 어울리는 모니카 벨루치와 풋풋한 청년 시절의 뱅상 카셀이 주요 인물로 나오며, 삼각관계인지 사각관계인지 오각관계인지 모를 얽히고 설킨 기기묘묘한 사랑 이야기가 탁월하게 변주된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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