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파랑새, 나의 딸 경연에게. 허드렛일 할 때는 꼭 손에 장갑을 끼거라. 설거지 할 때도 고무장갑 바로 끼지 말고 이 면장갑 먼저 끼고….”
1974년 한겨울이었다. 당시 미국 보스턴에서 남편과 가난한 유학시절을 시작하던 작가 정경연(61)에게 어머니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누런 상자를 열어보니 편지 한 통과 함께 뭉텅이로 면장갑 100켤레가 쌓여 있었다. 행여라도 딸의 손이 틀까 걱정스러운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만 있을 수 없어 장갑에 솜도 넣고 물감도 칠하기 시작했다. 어버이날 선물로 보낼 작정이었다. 힐끗 그 작업을 엿보던 교수가 “신선한 재료에 너무 창의적이다. 졸업 작품전에 찬조 출품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40년째 장갑을 그리며 ‘장갑 작가’라는 별칭을 얻은 정경연 얘기다.
그가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오랜만에 개인전을 연다. 7년만의 개인전이다. 힘든 미국 유학 시절을 거쳐 최연소 홍익대 교수(섬유미술·패션디자인)로 임용된 그는 장갑이라는 화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다. 장갑은 모녀 관계를 연결하는 정겨운 물건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상징하고, 서민적인 애환과 평등의 상징물로도 진화했다.
“장갑 안에 손이 들어가면 노숙자의 손이든 대통령의 손이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부터 새벽녘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손 모두가 다 똑같죠.”
큰 작품 하나에 목장갑 5000켤레가 들어간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러 개 혹은 수십개의 목장갑이 캔버스에 다양한 색깔로 붙어 있다. 지금까지 작가는 총 2만개의 목장갑을 사용했다.구체적으로 면장갑을 각각 염색을 하거나 일일이 물감으로 채색한 뒤 이를 말리고 찌고 다림질하고 캔버스에 붙이고 고정시킨다. 염색을 마친 면장갑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올을 모두 풀고 이를 다시 캔버스에 일일이 붙이는 작업도 있다. “장갑은 마치 물 같아요. 별표 모양으로 물을 얼리면 별표 얼음이 나오듯이 이런 형태, 저런 형태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할 수 있지요.”
작품 제목은 ‘무제’ ‘하모니’ ‘어울림’ 등이다. 작가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표현을 빌어 “‘무제’라는 제목은 ‘비어 있다’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반복적인 패턴과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단색화의 연장선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전시는 회화작품과 설치작품, 비디오 작품 등 총 30여점으로 구성된다. 전시는 11월 29일까지. (02)2287-3591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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