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창업주의 아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미술계 2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1970년대 문을 열어 국내 화랑계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갤러리현대의 경우 1세대 박명자 회장(73)의 장남 도현순 씨(49)는 케이옥션 대주주이자 전무로 경영 총괄에 나서고 있으며 차남인 도형태 씨(46)는 부사장에서 지난 4월 대표이사를 맡으며 새로운 작가와 컬렉터 발굴에 나섰다.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 이우환 등 거장들을 주로 취급하는 박명자 회장은 현대화랑으로 계열 분리해 원로 작가 전시를 전담하고 있다. 2세들이 경영에 나선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역할이 커지고 의사결정에 힘이 들어갔다는 관측이다.
국제갤러리 역시 이현숙 회장(67)의 3남매 모두 경영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장녀 티나킴(45·한국명 김태희)은 미국 뉴욕 굴지의 화랑들이 밀집한 첼시 21번가에 티나킴갤러리를 이전하면서 세계 화상(畵商)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 한국 작가들의 몸값이 높아지며 단색화 작가군과 박찬경 개인전을 잇따라 열며 국내외 미술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차녀인 김태희 씨(42)는 최근 국제갤러리 이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해 아트페어 등 해외 교류에 힘을 쓰고 있다. 외아들이자 막내인 김창한 사장(39)은 레스토랑과 갤러리 재정 전반에 대해 총괄하며, 그의 아내이자 이현숙 회장의 며느리인 송보영 씨는 학예실을 총괄하는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굵직굵직한 의사결정은 어머니인 이현숙 회장이 하고 있지만, 상당히 분업화된 시스템으로 변모하고 있다.
국제갤러리의 이웃집이자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접목을 꾀하는 학고재갤러리 역시 우찬규 대표(59) 차남인 우정우 실장(29)이 최근 마리킴과 중국 작가 궈웨이 전시 기획에 적극 뛰어들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단계다. 외동딸인 우은수 씨는 최근 학고재 전시 도록과 현수막 등을 총괄하는 계열사 ‘학고재디자인’ 대표로 취임했다.
가나아트갤러리와 국내 첫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을 세운 이호재 회장의 두 아들들도 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장남인 이정용 가나아트갤러리 대표(38)는 2년 전 대표로 취임해 ‘아트토이’를 미술관과 갤러리에 들여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주목을 끌었다. 그는 “국내보다 해외에 주력하고 있다. 새로운 작가들 영입에도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6개월 전 취임한 차남인 이정봉(36) 서울옥션블루 대표는 IT와 홍콩 경험을 살려 온라인과 모바일 미술품 경매로의 플랫폼 변화에 주력하고 있다.
중견화랑들의 세대교체도 활발하다. 한국화랑협회장 박우홍 동산방화랑 대표(64)는 ‘1세 같은 2세’. 인사동 선화랑 원혜경 대표는 작고한 김창실 회장의 며느리며, 올해 처음 코엑스에서 아트페어 ‘조형아트서울’을 선보인 신준원 대표 역시 신사동 청작화랑 손성례 대표의 차남이다.
사립미술관도 승계가 화두다. 올초 어머니에 이어 관장직에 오른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관장(51)에 유상옥 회장의 딸인 유승희 코리아나미술관 관장 뿐 아니라 성곡미술관과 OCI미술관 역시 오너의 딸들이 학예실에 포진하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이처럼 화랑가와 미술관에 2세들이 부상한 것은 이들의 나이가 이미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30대에서 50대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20·30대에 화랑을 차렸던 1세대 창업주들에 비해 경영 참여가 사실 늦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품 경매 시장의 경우 오프라인에서 온라인과 모바일 시장으로 플랫폼이 변화하고 있는 점도 2세들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컬렉터들도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컬렉터들을 잡기 위해서는 2세들이 적극 뛰어야 한다”고 밝혔다. 국내 미술시장 역시 외국 화랑들이 앞다퉈 진출하면서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했으며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도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어 가족간의 협업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화랑 업종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가족경영을 선호하고 있다. 컬렉션을 대대로 유지하면서 작가·컬렉터와의 신뢰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비즈니스의 성패를 가늠한다.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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