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지하실이나 트렁크에 같은 것들 속에 살아남아서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처럼 페스트가 2028년에 다시 부활한다. 모든 걸 보존하지 않고 파괴시켜 온 미래의 ‘오랑시(市)’는 과거의 바이러스인 페스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뮤지컬 ‘페스트’는 알베르 카뮈의 고전 원작을 서태지 대표곡 21곡으로 엮어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시간적 배경도 40년대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것을 미래로 바꿔 재해석했다. 서태지 음악의 개성을 살리기 위한 설정이다.
두 시간 삼십 분을 서태지 노래만으로 가득 채웠다. 조금 삐걱거리는 부분도 있지만 ‘기억제거장치’와 ‘욕망해소장치’로 표현된 인간을 가두는 체제와 그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태지의 ‘Human dream’ ‘대경성’ ‘죽음의 늪’ 등의 시적인 가사와 잘 어우러진다. ‘이 노래의 이 부분이 이렇게 쓰이다니’. 서태지 팬이라면 뮤지컬 넘버로 편곡된 서태지의 노래를 새롭게 만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특히, 1막을 마무리하는 ‘Coma’는 앙상블들의 격정적인 안무와 합창이 곁들여진 뮤지컬 합창곡으로 재탄생했다. 단연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다만 시적인 서태지의 가사와 달리 음악과 음악 사이 긴 설명조 대사들이 아쉽다. 뮤지컬은 카뮈의 페스트와 서태지 음악이 공유하는 저항과 연대를 모티브로 가져왔다. 그러나 이를 표현하는 비판적이고 날선 대사가 관중석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 어색하게 겉돈다. 직설적인 대사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이 왜 부조리에 맞서 싸우려 하는지 공감하기 어렵다. 또 원작에서 남성이었던 캐릭터 ‘타루’를 여성으로 바꾸는 시도를 감행했지만 전형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소비하고 말아버린 점도 아쉽다.
몇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창작뮤지컬이라는 고난의 과정을 6년동안 뚝심 있게 밟아온 점이 빛난다. 서태지의 음악은 새로움과 실험정신이 장점이다. 이 뮤지컬 역시 그런 서태지 음악의 특성을 담으려 노력했다. 보기 드문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뮤지컬이다. 로맨스 스토리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지만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인간다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주제의식도 돋보인다.
볼거리도 풍부하다. 서태지의 음악을 살리는 독특한 안무와 미래지향적인 무대 장치가 인상적이다. 공간이 제한되어있음에도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무대가 수시로 조립과 분해를 반복하면서 도시 전경과 기억제거장치 격리수용소 등으로 다채롭게 변모해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공연은 LG아트센터에서 9월 30일까지 이어진다. (02)1577-3363.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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