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모두 폐허다. 그건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시간의 문제다.
사랑할 수밖에 없던 시간, 사랑하지 않기로 한 시간. 소설가 정미경(56)은 그 시간이 갈라지는 자리에 못 하나를 ‘쾅’ 박아두고는 인류가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이별의 의미를 추적한다. 누구나 말해왔지만 늘 새롭고, 누구나 힘겨웠지만 늘 비참했던 ‘사랑과 이별’이란 주제는 이번에도 묵직하다. 제17회 이효석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단편 '못'(월간 '현대문학' 2016년 5월호)을 열어봤다.
잘나가는 금융회사 직원이던 ‘공’은 회사에서 잘린 뒤 마트 가전제품 직원 ‘금희’와 밀회를 즐긴다. 영화를 보고, 길고양이를 주워다 키운다. 어느 날 남자는 약속을 어기더니 다른 회사로 출근한다는 전화 한 통을 남긴다. 다시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밀회 장소가 한 사람만의 폐허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별은 늘 망각과 동행한다. “지문이 사라진 손가락”이나 “성문이 지워진 그 목소리”처럼 어떤 실루엣의 형상만 남겨지며 사라져간다. 폐허에서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그곳은 감옥이 되어 남겨진 자는 갇힌다. 소설 ‘못’은 폐허에 남겨진 금희의 감정을 추적하면 이별을 곱씹는다. 금희의 방에 걸린 커다란 못은 폐허로 변해버린 마음과 그 흔적을 상징해낸다.
휘어진 창틀로 난입한 길고양이 ‘점순이’는 금희의 균열된 삶에 쓰윽 침범했던 공과 같다. 고양이의 틱 장애는 자주 눈꺼풀이 떨리는 공과의 유사성을 일러준다.헤어진 뒤 운전 중 P턴을 할 때면 금희를 떠올리는 공과 달리, 금희는 두개골에 실금이 간 점순이를 동물병원에 맡긴 뒤 고양이를 버린다. 망각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관용을 베풀지 않기, 이것은 폐허의 첫 번째 법칙이다..
프랑스 작가 롤랑 바르트의 명저 ‘사랑의 단상’의 한 설화를 인용한 점도 눈에 띈다. 중국의 기녀를 사랑한 한 선비는 100일 밤을 정원 창문 아래에서 지새우면 함께 하겠다는 기녀 제안을 받아들인다. 99일째가 되던 날 밤, 100일째를 단 하루 앞두고 선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를 들고 그곳을 떠난다. 금희는 공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려 한다. 선비는 기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일까. 둘의 언약이 결국 깨져버렸듯, 공이 금희를 떠나버렸듯, 누군가는 먼저 배신함으로써 자신이 배신당할 불안을 유예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금희는 “연기처럼 사라지기밖에 더하겠어”라는 작명소 주인의 타박에, 이름을 ‘이영기’에서 금희로 개명했던 터였다. 개명 후에도 금희는 바뀌지 않은 어떤 운명을 마주하게 된다. “내 인생은 여전히 영기(연기)같아”라는 푸념이 그렇다.
심사위원 정지아 소설가는 “정미경 소설엔 언제나 ‘오늘’이 있고, 그 오늘은 자본주의적 욕망과 맞닿아 있다”며 “욕망의 끈을 붙들고 추락하는 남자와 추락할 것을 알기에 욕망하지 않으려는 여자의 쓸쓸한 삶을 정교한 언어로 직조한 수작”이라고 평했다. 심사위원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정미경 소설을 두고 “정통적인 의미의 단편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며 “해체하고 변형하고, 디테일을 생략하고 넣었다 빼는 고수의 솜씨가 느껴진다”고 평했다.
1960년생인 정미경 소설가는 2001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내 아들의 연인’, ‘프랑스식 세탁소’를 냈고, 장편소설로 ‘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아프리카의 별’을 받았다. 오늘의작가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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