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남북 간의 긴장되던 고조되던 개성의 어느 마을, 어머니가 가마솥에 엿을 고으면 부뚜막에 올라앉아 조청이 되는 것을 보며 자란 한 소녀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그 어린 소녀는 훗날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음식대가가 되었다.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장이자, 떡박물관장인 윤숙자(68세)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성 토박이로 경기도 안성이 고향이 어머니 사이에 2남 2녀를 뒀다. 윤숙자 소장은 막내로 전쟁이 일어나자 온 가족이 어머니 고향인 안성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전쟁은 개성에서 대가족을 이뤘던 윤씨 집안을 남과 북으로 갈라 놨다. 남쪽으로 온 가족들은 윤숙자씨 가족과 작은아버지 가족뿐이었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개성에 그냥 머물렀고 개성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피난 온지 3년 남짓 지나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린 4남매는 홀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고단한 가정 형편은 어른만의 몫은 아니었다. 어려운 속에서도 그가 끝까지 잡고 있었던 것은 학업에 대한 열정이었다. 직접 자신의 학비를 벌어가며 대학까지 진학하는 집념을 보여줬다. 대학 졸업 후 안성시 보건소에 취업을 한 몇 년 후 오빠가 살고 있는 부천 소재 보건소로 자리를 옮겼고 그 곳에서 평생의 후원자인 남편을 만나게 된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단아함’이다. 그의 단아함은 기억 속 아머니의 모습과 같다. 어머니는 손이 야무지고 음식솜씨가 뛰어나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개성 종갓집의 큰살림을 도맡아 하신 어머니에게 음식과 재료 그리고 만드는 이의 마음가짐까지 배웠다. 먹는 이를 배려하는 마음은 덤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오빠, 언니에게는 무척 엄격하게 대했다. 하지만 늦둥이로 태어난 윤소장은 남다른 사람을 느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어머니의 기억은 어머니가 집에서 음식을 할 때 오빠, 언니는 얼씬도 못하게 했지만 부뚜막 옆에 앉아있던 그의 입에 하나씩 넣어 주던 음식의 맛이다. 그러다 잊지 못할 사고도 생겼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게 된 어머니 곁에 그날도 그는 어머니 곁에서 쪼그리고 있었는데 그날은 급한 마음이셨기에 어머니는 그에게 채 썬 재료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채소를 집어 먹으려고 도마에 손을 내밀었다가 그의 어머니가 써시던 칼에 그만 손가락을 크게 베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상처는 그에게 아련한 추억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개성 음식은 서울, 전주음식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음식으로 꼽힌다. 현재 국내에서 개성 음식의 최대 권위자로 꼽히는 윤 원장은 전쟁 당시 같이 월남한 사촌오빠의 부인인 이명숙 원장과 함께 개성 음식 전파에 힘을 쏟고 있다.
이 원장은 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 했으며, 수도조리학교에서 부원장으로 후학양성을 했다. 1998년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첫해 설립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그는 윤 소장의 사촌 올케이자 우리 전통음식을 계승하는 영원한 동반자이다.
두 사람은 개성 토박이 집안에서 수백년 간 내려온 음식 비법을 활용해 100여 가지 대표음식을 소개하는 책을 같이 집필하기도 했다.
1998년 개인연구소 겸 후학양성을 위해 한국전통음식연구소를 설립했다. 대학에서 젊은 학생들에게만 우리 전통음식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음식은 학업처럼 젊은 시기에만 집중해서 배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다 폭 넓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3년부터 그는 음식으로 본격적인 해외교류활동을 펼쳤다. 한식 세계화를 위한 시작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적 피겨스타인 미셀 콴을 포함해
백악관 수석조리사였던 샘카스 셰프까지 해외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배우러 그의 연구소를 찾고 있다.
현재 연구소는 서울시 교육청이 인가한 서울시내 교사 교육기관이며, 농림축산식품부가 허가한 한국의 김치, 전통주, 궁중음식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우리 전통음식 책 연구에도 매진해 왔다. 15년 연구 끝에 14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고조리서인 1400년대 ‘식료찬요’, 1500년대 ‘수운잡방’, 1600년대 ‘요록’, 1700년대 ‘증조산림경제’, 1800년대 ‘규합총서’, 1900년대 ‘조선요리제법’ 속의 음식들을 재현시켰다. 우리 전통음식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다.
또한, 전 세계의 어느 누가 조리를 하더라도 동일한 맛이 나도록 하기 위해 2007년 그는 농림축산식품부, 문화체육관광부와 손을 잡고 한국음식 조리법 표준화 작업을 했다. 국내 최초로 세계 공용의 기준인 SI단위로 표준화된 조리법을 표기한 것이다. 조리 시간과 순서, 조리도구, 적정 배식 온도, 불의 세기까지 20여명의 연구진들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결과 ‘아름다운 한국음식 300선’을 완성시켰고, 특히 ‘아름다운 한국음식 100선’은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체코어, 아랍어, 스페인어 등 8개국으로 펴냈다.
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장은 한식외교관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만큼 우리 한식을 세계 속에 널리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음식이든 다섯 번 만 먹으면 그 음식을 다시 찾는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 음식은 발효음식이기 때문에 건강음식이다. 이러한 우리 음식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면서 세계인들이 우리 음식도 많이 찾아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35년 전부터 서울 신길동에 있던 한국조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처음 시작했다. 앞으로도 제자양성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더 활발한 활동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내년 초에는 전 세계의 한식세계화를 위한 전초기지를 만든다. 그가 미국LA에 설립하는 한식조리학교는 우리 전통한식과 세계 현지의 식문화를 두루 알고 있는 전문인 양성을 위한 교육을 통해 한식 세계화 작업의 한 층 더 속도를 높이고자 하고 있다.
그는 우리 전통음식의 우수한 전통성을 기반으로 우리 식문화 대중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한식의 세계화를 자신의 손으로 이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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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글=이길남 / 사진=이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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