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마주친 여자아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배가 불러있기도 하고 쏙 들어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 하나도 살아남기 바빴다."
25일 오후 MBN '시사마이크'에 출연한 박경보씨는 1968년 5세의 나이에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 12년동안 감금당했던 당시의 생활을 떠올렸다.
고아원에 함께 지내던 친형을 찾기 위해 부산역으로 온 박 씨는 덩치가 큰 성인 3명에게 붙잡혀 냉동탑차 속으로 내던져졌다. 냉동탑차 속에는 이미 5~6명의 성인과 아이들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영문도 모른 채 복지원으로 끌려온 박 씨는 외주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다.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조장들이 각목으로 내려쳤다.
박 씨의 주장에 따르면 여자아이들은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했다. 그는 2년 넘게 봐왔던 여자아이들이 갑자기 배가 불러있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힘든 감금 생활을 견디지 못한 박 씨는 줄 톱을 구해와 쇠창살을 조금씩 잘라서 탈출에 성공했지만 곧바로 붙잡혀왔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군인이나 파출소 등에 이끌려 다시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졌다.
당시 형제복지원 수사 담당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도 이날 함께 출연해 지난 수사 과정을 속속히 털어놨다.
김 변호사는 지난 1987년 1월 압수수색을 위해 형제복지원을 첫 방문했다.
그는 "형제 복지원 입구는 교도소 철문보다 더 높고 웅장했다"며 "전두환 정부로부터 39억원 가량의 대폭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추가 지원금과 노동력을 위한 복지원의 만행이 날로 심해졌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의 주장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이 당시 내세웠던 4대 국정지표 중 하나인 '복지사회 실현'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김 변호사는 "당시 복지사회는 부랑자들을 데려다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이었고, 88올림픽이 다가오니까 마구 잡아서 수용하는 방식으로 부랑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담당 검사였던 김 변호사는 수사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방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검찰 내부에서 수사활동을 차단했고, 조사를 위해 복지원을 방문한 경찰관들도 쫓겨났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1987년 6월 박 원장은 징역 10년과 벌금 6억8000만원을 선고 받았지만, 7번의 재심을 통해 2년6월로 형이 대폭 감소했다"며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의 수족(手足)노릇을 충실히 했다"고 지적했다.
[매경닷컴 속보부 / 사진 출처 : MB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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