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팅는 제조업의 혁신을 가져다 줄 산업”이라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언 이후, 3D 프린터 산업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국산 3D 프린터 개발로 세계 시장에 뛰어든 CEO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캐리마의 이병극 대표가 그 화제의 인물입니다. ‘사진 현상기’를 시작으로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MBN ‘정완진의 The CEO’에서 직접 만나 들어봤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Q.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신다면?
7남매 중 셋째였는데 일곱 명의 형제 들 중에서 유난히 하는 행동이 유별나 ‘별종’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형, 누나는 항상 학업에 열중하셨는데 저는 달랐거든요. 저는 집 안에 있는 가전제품을 모조리 분해해보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죠. 또 분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부품들로 다른 장난감을 만들어 보기도 하는 등 기계 분해와 조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당시 굉장히 귀했던 사진기를 선물로 받은 후로는 사진기에 푹 빠지기도 했었죠.
Q. 첫 사회생활의 시작은 어떠셨나요?
‘현대칼라’라는 사진을 현상하고 사진 현상기를 수리하는 곳에 입사한 것이 저의 첫 사회생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진을 현상하는 ‘기술부’로 입사를 했는데 신입사원이니만큼 청소부터 문고리를 고치는 사소한 일까지 나서서 했습니다. 기계에 관심도 있다 보니 심지어 기계 수리에도 조금씩 가담했어요. 그러다가 기계를 고치는 것이 제 적성에 잘 맞아 본격적으로 ‘기계 수리부’에 옮겨 사진 현상기를 전문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계 옆에서 밤을 새우는 날도 많았고요. 고치기 힘든 것도 그 누구보다 호기심과 끈기를 갖고 고치다보니 회사의 높은 분들께도 저의 얘기가 전해졌나 봐요. 덕분에 새로운 기계도 먼저 접하게 해주셨고 당시 우리나라보다 앞서있었던 일본의 사진 현상기 수리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연수를 보내주시기도 하셨죠.
Q. 창업을 하시게 된 계기는?
‘현대칼라’를 나와 ‘한국천연색’이라는 동종업계에서 근무하며 경을 더 쌓은 뒤에 ‘이제 내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생각에 회사를 나와 ‘CK산업’을 창업했습니다. 일본의 사진 현상기를 받아 우리나라에 판매하는 회사였습니다. 직원 5명 정도에 아주 조촐하게 시작됐지만 사진 현상기가 당시에 아무 곳에서나 구하기 힘든 제품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사업을 아주 잘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Q. 첫 창업,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사업을 잘 이어 나가다가 한 2년 정도 지났을까요? ‘수입선다변화’라고 해서 일본의 사진 현상기를 우리나라에 수입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국산 제품을 많이 이용하자는 좋은 취지였지만 일본의 제품을 판매하는 저희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백방으로 시장조사도 해보고 알아본 결과 몇 가지의 부품은 일본에서 수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때 일본 부품과 우리나라 부품을 조립해 ‘국산화’를 시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사진 현상기 국산화에 들어갔습니다. 국산화를 하는 것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리 기계 조립에 일가견이 있고 사진 현상기의 전문가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기계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이었기에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다시 신입사원이 된 것처럼 밤을 새는 개발이 계속 되었죠.
Q. 개발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결국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일본 사진 현상기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데 비해 성능은 그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국내의 사진관이나 사진 현상소에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고 저는 ‘사진 현상기’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국내뿐 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수출까지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연 매출이 100억 원을 넘었고 직원도 13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Q. 사진 현상기 국산화 외에 하신 개발이 있으시다면?
‘착탈식 디지털 현상기’를 만들었습니다. 사진 현상기로 전성기를 누릴 때 쯤 디지털 시대가 다가오면서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 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 아날로그 현상기를 만들었었는데 까딱하면 시대에 도태 될 위기에 놓인 것이죠. 고민을 하던 찰나에 값비싼 디지털 현상기를 사지 못해 아날로그 현상기를 계속 사용하는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그들에게 값은 저렴하면서 성능은 디지털 현상기와 같은 제품을 판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DLP( Digital Light Processing)라는 칩을 이용, 아날로그 현상기에 이 칩을 장착하면 디지털 현상기로 쓸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개발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인고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결국 국산화까지 성공했던 성격답게 ‘착탈식 디지털 프린터’를 만들어냈고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Q. 3D 프린터를 개발하시 게 된 계기는?
‘착탈식 디지털 현상기’로 한참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중국에서 저희 제품을 불법으로 복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격도 저희 제품보다 저렴했고요. 그랬기 때문에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3D 프린터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이 많고 마침 새로운 제품을 찾고 있던 저에게 3D 프린터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제가 가지고 있는 DLP 장착 기술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볼 만한 제품이었죠. 그래서 그 길로 바로 3D 프린터가 쓰이는 해외 곳곳을 시장조사하고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생소했던 3D 프린터, 개발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개발을 시작한 당시가 굉장히 추운 겨울이었는데 200평이나 되는 공장에 홀로 앉아 난로 하나에 의지하며 부품하나부터 저 혼자 개발을 했습니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발에는 심각한 동상까지 걸릴 정도였어요. 그럼에도 밤을 새워가며 끈질기게 개발을 이어갔습니다. 조형물을 구성하는 재료들도 고분자 박사들에게 자문을 구해가며 독학으로 개발했습니다. 다양하게 재료들을 섞어 보면서 최상의 비율을 찾아냈고 무려 900번이 넘는 시도 끝에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개발에 몰두하는 사이 직원들은 모두 회사를 떠나버렸고 5년이라는 개발 시간 동안 무려 1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저에게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죠.
Q. 3D 프린터 출시 후, 어떤 반응들을 느끼셨나요?
사실 2009년에 개발을 마친 후에는 반응이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3D 프린터가 매우 생소하기도 했고 국산에 대한 불신도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끝없는 발품 영업과 홍보로 조금씩 3D 프린터를 알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3년 2월에 ‘3D 프린터는 제조업에 혁신을 가져다 줄 산업’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3D 프린터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저의 제품에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품질은 뒤지지 않으면서 가격은 해외 제품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는 제조업뿐 만 아니라 의료산업 쪽에서도 반응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3D 프린터의 진가는 이제 시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Q.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우주도 가는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우주에 갈 때는 3D 프린터 하나만 챙겨 가면 모든 생필품이나 가제도구를 바로 만들어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저도 개발을 멈추지 않고 제품군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또 가정에서도 3D 프린터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가정용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제 나이가 어느덧 예순 살이지만 아직도 개발할 것이 많고 제 호기심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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