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Travel] 새해엔 내소사 대웅전 문살무늬처럼
입력 2025-01-16 14:54 
내소사 대웅전 문살
전북 부안으로 떠난 새해 첫 여행

부안은 언제 가도 좋은 여행지다. 문살무늬 하나하나가 감동을 주는 내소사와 바다 향 진한 곰소항, 풍광으로 가슴을 채우는 채석강과 적벽강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여행을 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니 말이다. 백합과 바지락죽, 곰소항 젓갈 등 맛있는 음식도 가득하다. 부안으로 떠나는 겨울 여행, 만족감 백 퍼센트를 보장한다.
새해가 시작됐다. 오십두 번째 새해를 맞다 보니, 솔직히 새해에 대한 기대 같은 건 없다. 그냥 그러려니, 또 한 해가 시작됐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어제 뜬 해가 오늘도 떴구나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새해 목표를 서른 번은 넘게 세웠다. 하지만 그걸 이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목표는 그냥 목표일 뿐이다. 세우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그런.
그래도 작년(2024년)에는 크고 작은 새해 목표를 세웠는데, 연초에 세운 계획 중에 이룬 게 뭐가 있나 하고 살펴보았더니, 다행스럽게도 딱 두 개가 있었다. 바로 ‘산책과 ‘체중이다. 계획했던 만큼 걸었고, 목표했던 체중에 도달했다. ‘이 정도면 정말 잘했어, 대단해 스스로에게 축하를 건네며 무려 석 달 만에 술을 마시며 자축했다.
2025년 이뤄야 할 목표에도 산책과 체중, 이 두 가지를 가장 윗줄에 올렸다. 이 두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이 걷고 덜 먹으면 된다. 정말 간단하다. 다행히 아직은 1월이라 이 두 가지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차를 마시며 메모 패드에 연필로 오늘 하루 먹어야 할 음식을 꾹꾹 눌러쓴다. ‘낫또-삶은 계란 두 개-방울토마토 10알, 블루베리 한 줌-샐러드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침에 1만 보, 저녁에 1만 보를 걷는다.
(위)겨울바람에 흔들이는 격포항의 어선들 (아래) 단아한 절집을 연상시키는 내소사
살아 보니 ‘산다는 건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정작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더라는 것. 그래서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뭔가 이룰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또 좋은 글을 쓰는 것과 좋은 인생을 사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좋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은 산책을 하자. 걷다 보면 뭔가 오늘 내가 잘할 수 있는 뭔가가 떠오르겠지.
내소사 숲길을 걷고 맛있는 백합 정식을 먹었습니다
2025년에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해 보려는 일,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여행이다. 이십 년 넘게 여행 작가로 살면서 여행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는 걸 지난해 어느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알게 됐고 약간 슬펐다. 그러면서 여행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아는 형에게 카톡을 넣었다. ‘여행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아침입니다. 아무튼 올해는 ‘진짜 여행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여행을 다닐 생각이다. 우선은 집 밖으로 나서자. 그러다 보면 뭔가 내가 잘 쓸 수 있는 게 떠오르겠지. 올해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고 그 마음으로 떠나온 곳이 부안이다.
(좌로부터 시계방향)내소사 대웅보전, 직소폭포, 눈 내린 곰소염전의 소금창고
여행 기자를 처음 시작할 무렵, 이 땅의 풍경과 문화며 역사, 맛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무지렁이에 불과하던 나는 부안을 여행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구나, 이 땅에 이토록 깊은 맛이 있었구나 하고 느끼게 된 것이다. 나고 자란 김해와 대학 시절을 보낸 마산, 약간의 서울 생활의 경험이 지리적 삶의 영역의 전부였던 내게 부안은 내 삶의 인식에 관한 지평을 넓혀 주었다. 신영복 선생도 감옥 창틀에 핀 풀씨의 새싹을 보고 생명의 의지를 깨달았다지 않은가.
부안 하면 떠오르는 여행지로 채석강, 곰소항, 직소폭포 등이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앞자리에 놓이는 곳은 아마도 내소사일 것이다. 내소사에 이르는 푸른 전나무숲길과 대웅전의 창살무늬는 절이 이토록 그윽하고 예스러우며 소박한 멋과 정취를 가질 수 있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해준다. 여행 작가로 살며 부안을 수도 없이 찾았지만 지금도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여전히 내소사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걷고 경내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면 설렌다.
(위)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내소사 전나무숲길 (아래)수성당에서 내려다 본 적벽강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지어진 절이다. 앞서 말했듯 일주문에서 절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전나무 숲으로 함께 비교할 수 있는 곳이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일 텐데, 월정사 일주문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이라면 이곳 숲길은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심겨 있어 더 푸근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난다.
길이 600여 미터의 내소사 전나무 숲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뭔가 좀 그럴싸한 새해 목표가 없을까? 가령 매출 목표라든가, 베스트셀러 만들기라든가 …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도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면, 내년 역시 올해와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면 된다라는 다소 철학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눈 내린 겨울날의 내소사
이런저런 상념과 함께 걸으며 내소사 경내로 들어섰다. 내소사 경내는 아담한 편이지만 커다란 고목이 사찰의 중심을 잡고 있어 가볍거나 경박해 보이지 않는다. 고려동종, 법화경절본사본, 대웅보전, 영산화쾌불탱화 등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으니 부화(浮華, 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한)한 사찰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내소사에서 빼놓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바로 대웅보전 문짝에 새겨진 창살무늬다. 국화와 연꽃 문양이 새겨진 문살이 채색 없이 말간 나뭇결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허리를 숙였다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한 발짝 물러서기도 하며 요리조리 문살을 살핀다.
새해엔 이런 아름다운 무늬 하나 마음 속에 새기면 좋겠다. 그러려면 뭘 해야 할까. 아마도 이런 무늬는 돈이나 성취보다는 사랑이나 연민 같은 도구로 새겨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러면서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내소사의 본래 이름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라는 뜻의 소래사(蘇來寺)였다고 하니 새해 이 무렵에 찾아봄 직한 곳인 것 같다.
빗질을 하고 있는 내소사 스님
적벽강과 채석강을 깎아 만든 파도 앞에서
내소사를 나와 먼저 찾은 곳은 적벽강이다. 격포항 일대의 해안 절벽을 일컫는데 그 길이는 약 2킬로미터에 달한다. 물론 진짜 적벽강은 중국에 있다. 송나라의 소동파가 놀았던 곳이다. 부안 적벽강의 풍경이 중국의 그곳과 흡사해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적벽강은 물이 흐르는 ‘강(江)이 아니라 퇴적암 절벽 언덕을 뜻하는 ‘강(岡)이다. 파도에 침식돼 노출된 불그스름한 색조를 띤 절벽이 바다에 맞서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간다.
바닷가에는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몽돌이 깔려 있다. 크기는 애기 주먹만 하다. 뜨거운 용암이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퇴적물과 뒤섞여 만들어진 것인데 후추를 뿌려 놓은 것 같아 ‘페이퍼라이트라고도 부르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암석이다. 해안가 절벽 끝에는 수성당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부안에는 어부들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개양할미의 전설이 전해진다. 개양할미는 서해바다를 돌아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얕은 곳은 파내는 신으로 풍어를 돕는 역할을 한다.
(좌)바위가 수만 년 동안 쌓여 만들어진 채석강 단애 (우)층층이 쌓인 적벽강의 단애
할미는 몸의 덩치도 커서 깊은 바다에 들어가도 겨우 발목을 적실 뿐이다. 수성당 앞 바다는 물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며, 바로 앞에 있는 위도 섬 부근 바다는 조기잡이로 유명한 칠산바다라서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올리고 풍어와 무사고를 비는 굿을 한다. 지금도 이러한 전통은 명맥을 잇고 있다.
적벽강에서 격포 해변을 지나면 채석강이다. 채석강이란 명칭 역시 옛날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 위의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채석강은 강이 아니라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일대 1.5킬로미터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채석강의 세찬 파도
부안을 처음 찾았을 때 이 채석강 풍경에 압도되어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내가 살던 마산과 통영, 부산의 바다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흔히들 이 풍경을 두고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직접 보면 그 말보다 더 적절한 묘사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층층이 쌓인 이 돌들은 약 7,000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한 단애다.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온 파도가 억겁의 세월 동안 화강암과 편마암을 내리치고 깎아 이 풍경을 만든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꾸준함이 가장 큰 재능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매일매일 뭔가를 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산다는 건, 하고 싶은 건 정말 많은데 정작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게 되어 있다. 그게 인생이다. 매일매일 꾸준히 하다 보면 뭐라도 된다. 적벽강과 채석강을 깎아 만든 파도처럼 말이다.
(위)층층이 쌓인 적벽강의 단애 (아래)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은 채석강
‘맛있다라는 행복한 말
채석강을 나와 격포항으로 오니 배가 고프다. 뭐라도 먹자. 아니 ‘맛있는 걸 먹자. 살면서 가장 행복을 느끼게 하는 말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맛있다라는 말을 꼽겠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멋있어라는 말보다 더 좋은 게 ‘맛있어라는 말이다. 여행은 일부러 비용을 들여 행복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비용을 가장 잘 쓰는 일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다.
변산의 별미는 곰소항 젓갈 정식이다. 부안은 서해의 풍부한 해산물이 모이는 곳. 예로부터 천일염도 만들었다. 곰소항 옆에 자리한 곰소 염전은 우리나라 대표적 천일염 생산지이기도 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조선시대부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던 자염식 소금을 생산해 왔던 곳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의 곰소 염전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다양한 젓갈이 올라오는 곰소항 젓갈정식
곰소 젓갈은 변산반도 근해에서 잡는 어류에 곰소 염전에서 1년 이상 저장해 간수를 제거한 깨끗한 소금을 더해 만든다. 포구 바로 옆으로 젓갈 가게가 늘어서 있다. 젓갈 정식을 내는 식당들이 몰려있는데, 젓갈 정식을 시키면 어리굴젓, 오징어젓, 창난젓, 낙지젓, 꼴뚜기젓, 갈치젓, 갈치속젓, 명란젓, 바지락젓 등 갖가지 젓갈로 가득한 상을 받을 수 있다.
바지락죽을 먹을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기름진 서해 갯벌에서 금방 캐어낸 싱싱한 바지락을 가지고 요리하기 때문에 쫄깃쫄깃한 식감과 향이 뛰어나다. 하지만 바지락은 봄이 제철이니 그때 다시 와서 먹자. 내소사는 벚꽃 가득 필 때도 좋으니 말이다.
잠깐의 고민 끝에 백합을 먹기로 했다. 백합은 다른 조개에 비해 조갯살이 푸짐하고 탱탱한 것이 특징이다. 달짝지근한 첫 맛과 쌉싸름한 끝 맛을 지닌 백합은 물이 좋을 땐 회로, 저녁 무렵엔 탕이나 구이로 다양하게 변신한다.
격포항 앞에 자리한 백합 정식 식당으로 가 이건 먹어줘야지!” 하며 호기롭게 백합 정식을 시켰다. 탕부터 구이, 죽까지 백합 요리가 한 상 가득 차려져 나온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가게였지만 뭐 어때, 희희낙락하며 먹기로 했다. 여행 온 기분으로 먹으면 현지 음식은 뭐든지 몇 배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스페인에서 먹은 파에야도, 포르투갈에서 먹은 바칼라우도 전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식당에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은 것으로 기억한다.

먼저 국물을 맛본다.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맛이다. 좀 더 과장해보자면 스무 살부터 마신 술의 숙취가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국물이 어떻게 이렇게 향긋할 수가 없는 거지? 서울에서 이걸 먹으면 절대 이 맛이 안 난다.
밖은 영하의 기온이지만 따뜻한 바닥에 앉아 향긋한 국물을 떠먹으며 조갯살을 먹고 있으니 마음이 헤실헤실 풀어진다. 모든 일에 ‘아무렴 어때 하며 너그러워진다. 그래도 여기 부안까지 와서 ‘새해엔 내소사 대웅전 문살 같은 무늬 하나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됐으니 다행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다짐이다.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십둘도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부안군 변산면 여행 정보
변산에 ‘변산 마실길이라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변산반도를 따라 걷는 길이다. 북쪽의 새만금홍보관에서 남쪽의 줄포만 갯벌습지공원까지 바닷가의 마을과 마을을 이은 66킬로미터의 길이다. 구간의 특징에 따라 8코스로 구분했다.
부안 바지락죽의 원조는 변산온천산장이다. 붐비는 날은 대기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이미 ‘전국구 맛집이 됐다. 계화회관은 백합죽으로 유명하다. 곰소항 인근의 곰소쉼터는 젓갈 정식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집이다. 격포항 주변에 백합 정식을 내는 집이 많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4호(25.01.2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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