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지붕 없는 박물관…성북로를 걷다 [Local Mania]
입력 2024-12-20 10:18 
(사진 장진혁)
성북동은 유서 깊은 동네다. 한양도성이 폭 감싼 이 동네에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하던 어영청의 주둔지인 성북둔이 있었다. 지금의 선잠단 부근이다. 그래서 본래 계곡 마을로 시냇물과 수석이 잘 어울린 이 동네는 ‘성북동이 되었다.

성북로는 본래 성북천을 끼고 2차선 도로가 북악스카이웨이쪽으로 나 있었다. 1980년대 천이 복개되면서 도로 역시 넓어졌다. 하지만 길은 천이 흐르던 방향과 굽이마저 그대로이다. 성북로는 유난히 골목길이 많다. 그 골목길마다 봐야 할 것, 들러야 할 것 투성이다.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로 나오면 약 3km의 성북로가 시작되는데 가장 먼저 나폴레옹과자점이 등장한다. 1968년 2월에 문을 연 나폴레옹과자점은 흔히 ‘서울 3대 빵집으로 홍대앞 리치몬드제과, 강남 김영모제과와 함께 거론되는 곳이다.
조금 걸으면 선잠단지가 나온다. 이 단지는 조선 태종 때 만들어졌는데 선잠제를 지낸 곳이다. 누에농사 풍요를 기원하면서 잠신 서릉씨에게 매년 음력 3월 길한 뱀날을 잡아 제를 올렸다. 그 위에는 성북선잠박물관이 있어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길은 고즈넉하다. 도로에는 마을버스인 1111, 2111번만이 다닌다.
성북예술창작터는 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의 집터에 자리했다. 조금 더 올라가보자. 그러면 혜곡 최순우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거처한 최순우 옛집이 나온다. 예술사학자 최순우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로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알려준 인물이다.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썼다.
만해 한용운이 해방을 불과 1년 앞두고 1944년 세상을 떠나기 전 기거했던 심우정, 소설가 이태준이 1946년 월북때까지 기거했던 수연산방도 있다. 이태준은 ‘벼루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각오로 ‘수연산방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단편선 「달밤」, 「까마귀」 등을 세상에 선보였다.
길 끝부분에 이르면 기타를 맨 남자가 지붕에 올라가 있는 건물이 나온다. 바로 뮤직갤러리 리홀이다. 이곳에는 LP만 12만 장이 있는데 음악 감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다. 진공관 튜브시스템으로 신청곡도 들을 수 있는 뮤직 갤러리다. 걷느라 배가 출출하면 1987년 이래 택시기사들이 애정하면서 유명세를 탄 금왕돈까스를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른 손바닥보다 큰 돈까스에 완두콩, 마카로니 샐러드, 고추, 수프와 밥이 한 세트이다.
성북로 3km는 조금 긴 듯하지만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면 그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거리가 정말 많은 동네다. 서울에서 옛것의 정취를 이렇게 조용하게 만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걸음이다.
[글과 사진 장진혁(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0호(24.12.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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