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원 "작품 속 한강,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인함과 상실 말해"
맛손 위원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가능하지도 않다"
맛손 위원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가능하지도 않다"
한 작품이 아닌 작가의 작품들 전반으로 문학적인 성취를 평가하는 세계적인 권위의 노벨문학상이 작가 한강에게 수여됐습니다.
한림원 소속으로 노벨문학상 선정에 참여한 엘렌 맛손 노벨문학상위원은 한국 시각으로 11일 새벽,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 문학 부문 시상 연설에서 한강의 작품 세계를 흰색과 붉은색, 두 개의 색이 만나는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눈(雪)을 나타내는 흰색은 화자와 세상 사이에 보호막을 형성하는 동시에 슬픔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붉은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고통, 피, 칼로 깊게 베인 상처를 의미합니다.
맛손 위원은 이 시상 연설에서 작가 한강은 기억의 조각을 맞추며 지식과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학살로 쌓인 시체 더미에서 피가 흐르고 짙어지다가 이내 호소가 되며 그리 답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질문으로 변한다"며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가능하지도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발언 전문입니다.
한강의 작품에서 두 가지 색, 흰색과 붉은색이 만납니다. 흰색은 눈 나타내며 작가의 여러 작품에 눈이 내려서 화자와 세상 사이에 보호막을 드리워 줍니다. 하지만 흰색은 동시에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합니다. 붉은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고통, 피 그리고 칼로 깊게 베인 상처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목소리는 매혹적일 만큼 부드럽지만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잔인함과 회복될 수 없는 상실을 말합니다. 학살로 쌓인 시체 더미에서 피가 흐르고 짙어지다가 이내 호소가 되며 그리 답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질문으로 변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죽은 자, 납치된 자, 실종된 자와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들을 위해 어떤 빚을 지고 있을까요. 붉은색과 흰색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 반복적으로 다룬 역사적인 경험을 상징합니다.
2021년 작(作)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생성합니다. 중간에 떠다니는 자는 어디에 속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자입니다. 이 소설은 내내 눈보라 속에서 전개됩니다. 소설 속 화자는 기억의 조각 맞추면서 시간의 층위를 미끄러지듯 통과하고 죽은 자의 그림자와 소통하고 이들의 지식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결국 모두가 지식과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과정이 견디기 어렵다고 해도 말입니다.
절묘하게 구현된 한 환상의 소설 속 친구는 육체가 머나먼 병상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에서 자료집이 담긴 상자를 꺼내 역사의 모자이크 한 조각을 더해줄 수 있는 문서를 찾아냅니다. 꿈이 현실로 넘쳐흐르고 과거는 현재로 이어집니다.
경계가 녹아 사라지는 이러한 변화는 한강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더듬이를 뻗어 양방향을 가리키고 신호를 포착하고 또 해석하려 합니다. 인물들은 때때로 본인이 보고 목격하는 것으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매번 마음의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요한 힘을 가지고 계속 나아갑니다. 누가 나를 죽였지? 살해당한 소년의 혼이 묻습니다. 소년의 이목구비가 문드러지고 윤곽선이 무너집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또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오로지 고통만 남겨준 이 몸뚱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문으로 으스러져 피 흘리는 이 몸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몸이 포기하면 영혼이 말을 이어갑니다. 혼이 피폐해지면 육체가 걸음을 이어갑니다. 깊은 내면에는 고집스러운 저항, 말보다 강한 주장, 또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취약하고 어떤 면에서는 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꼭 필요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자료를 하나 더 요청하고, 살아남은 목격자를 한 명 더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이 희미해지면 죽은 자의 그림자가 벽 위를 계속 맴돕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 무엇도 끝나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한강 작가님, 한림원을 대표해 2024년 노벨상과 함께 진심으로 따뜻한 축하를 전하게 돼 영광입니다. 이제 국왕 폐하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