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기자 어디가] 한국의 보르도, 영천에서 느낀 활기
입력 2024-12-10 04:46  | 수정 2024-12-10 14:54
농장에서 직접 딴 포도
겨울 와이너리의 따스함
강우량 적고 일조량 많아 포도 재배에 최적
10곳 와이너리서 시음 및 체험 가능

영천 황토는 시집 와서 입은 속바지에 묻은 황토가 아이 셋 낳을 때까지 안 진다고 할 정도로 진합니다.”(경북 영천 별길 와이너리 최영숙 대표) 흙이 진하고, 강우량이 적고 일조량이 강해 포도 농사에 제격인 경북 영천. 지난 11월 대형 마트 샤인머스켓 특판에서 사흘간 105톤의 포도를 완판시킨 한국의 보르도, 영천 와이너리를 여행했다.
와인 관광 메카 꿈꾸는 영천
마트에서는 사기도 힘들 정도로 비싼 샤인머스켓이 10여 명의 체험단 테이블마다 1송이씩 올려져 있다. 포도를 으깨 발효시키는 와인 만들기 체험이다. 알의 크기는 작지만 머리가 아득해질 만큼 달다. 마트 포도는 무게를 부풀려 일부러 크게 만든 겁니다.” 신기한 것은 샤인 머스캣의 맛이 와이너리마다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 각 와이너리를 다니며 각기 다른 양조 방법과 포도의 맛을 비교하는 것도 영천 와인 투어의 포인트다.
95% 발효하고 5%의 효모는 어라야(얼려야) 됩니다.”(우아미 와이너리 이금자 대표) 사인(샤인) 머스켓 먹고 사인 했습니다!”(피식대학 이용주) 구독자 280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영천 편에 ‘금자니소스로 등장한 이금자 대표는 강력한 사투리와 친화력으로 인해 와인 투어를 온 객들을 끊임없이 웃게 만든다. 장미가 그려진 라벨에서 우아함이 느껴지는 와이너리에서는 설탕이 아닌 포도의 단맛으로만 와인을 만든다. 우아미를 위시해 10곳의 와이너리가 성업 중인 영천은 어쩌다 한국의 보르도를 꿈꾸게 됐을까.
우아미 와이너리 이금자 대표
2007년 와인산업 선포식을 열고 와인 가공 기술개발과 품질 개발에 본격 나선 영천시는 세계 5대 와인 품평회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 와인트로피와 아시아 와인트로피 등 국내외 각종 주요 와인 품평회를 휩쓴다. 포도 재배부터 양조까지 전 과정을 관리하며 와인투어, 와인학교 등과 연계, 10개의 지역 와이너리 대부분이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색이 진하고, 미네랄이 많으며 배수도 잘 되는 영천의 황토 흙 역시 포도를 잘 자라게 한다. 연간 27만 병을 생산, 국내 와인시장의 약 30%를 점하고 있는 영천은 지속적으로 와인투어와 와인 페스티벌을 운영해오고 있다.
가장 먼저 최근 세계 5대 와인 품평회중 하나인 베를린와인트로피를 휩쓴 오계리 와이너리를 찾았다. 비탈진 곳에서 42년 동안 포도 농사를 지어 온 조성현 대표는 2009년 법인을 설립한 뒤 당도가 높은 청수 100%로 와인을 만들어왔다. 영하 20도에서 냉동시킨 포도는 과당을 전혀 넣지 않았음에도 당도가 40브릭스(Brix)까지 올라가는 것이 특징.
(캡션)포도 따기, 와인 시음, 룰렛 이벤트 등을 진행하는 오계리 와이너리와 조성현 대표
경북 영천 와이너리 10곳
①우아미 와이너리(봉계길 52)
②고도리 와이너리(고경면 민도길 63)
③조흔와이너리(조흔달길 22-53)
④대향 와이너리(금호읍 원제1길 27-16)
⑤와인숯불 위(We) 와이너리(금호읍 금호로 386-21)
⑥별길 와이너리(금호읍 금호로 337-15)
⑦한국와인 뱅꼬레 와이너리(금호읍 창산길 100-44)
⑧오계리 와인(금호읍 사근달길 93-7)
⑨블루썸 와이너리(대창면 금박로 1021)
⑩까치락골 와이너리(대창면 금창로 1203)
※와인터널 및 판매장(천문로 622-13)

직접 딴 포도로 와인을 빚고, 시골 밥상까지 즐기다
문경 오미자와인과 청도 와인 터널, 마주앙 와인을 개발하고, 영천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뱅꼬레(Vin+Coree)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하형태 대표는 40년 경력의 와인 전문가다. 식품공학을 와인 소믈리에 딸과 농수산대 과수과를 전공한 아들, 와인 투어 해설을 하는 부인과 함께 ‘패밀리 와이너리 뱅꼬레를 운영 중이다.
감 와인이 메인이죠. 박람회 때 인기가 폭발했는데 APEC 정상 회의 때 만찬주가 됐습니다. 와인의 명가 프랑스로 수출하는 것이 목표죠.” 뱅꼬레는 MBA포도와 샤인머스켓, 청수(청포도) 포도뿐 아니라 블루베리, 복숭아, 자두로도 와인을 만든다. 같은 청수 포도라도 제조공법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것이 하 대표의 이야기. 2025년에는 8~10톤의 와인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뱅꼬레 와이너리(좌)와 와인 라벨 만들기 체험(우)
‘와인이 있는 별길 종갓집이라는 와인 투어를 진행 중인 별길 와이너리는 실제로 ‘남자들이 절하고 나면 안 일어난다는 종가집으로 시집 온 최영숙 대표가 이끌고 있다. 1년에 제사를 12번 이상 지내는 시댁은 50년 이상 포도 농사를 지어왔다. 별을 따는 태몽을 꾼 최 대표는 이런 종갓집에 시집온 뒤 별길 와이너리를 설립한다. 그러나 수줍은 모습과 반전을 이루는 대장부 같은 최 대표의 행보 가운데에는 위기도 있었다. 발효를 막는 첨가제를 넣지 않아, 아이스와인이 과하게 발표된 것.
서울 가락시장에서 새벽 3시에 박스 당 3000~4000원 밖에 안 된다”는 전화를 받고 다시 차에 실어왔어요. 얼린 뒤 발효시켜서 아이스와인으로 만든 거죠. 당도 60브릭스(Brix) 과즙을 오크통에서 7년 숙성시켰더니 알코올 도수가 14%에서 20%가 됐어요. 지금은 없어서 못 팔죠.”(최영숙 대표)
나만의 라벨을 달아갈 수 있는 별길 와이너리
별길에서 5분 정도 걸었더니 대향 와이너리가 나온다. 2010년 설립, 베를린 와인트로피에서 2년째 금상을 받은 곳이다. ‘대향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아로마 향을 오래 잡아두기 위해 주로 저온발효를 시킨다. 영천에 위치한 많은 와이너리가 그렇듯, 2세가 합류해 마케팅을 맡고 있다.
대향와이너리 정동규 대표
와이너리를 다니며 종일 핑거푸드만 섭취했더니 슬슬 위장이 뭔가 먹여달라는 신호를 보내온다. 통유리 너머로 와이너리 포도밭이 보이는 까치락골 와이너리는 15가지 반찬으로 차려진 시골 밥상 때문에 찾는 이가 많은 곳. 편안한 시골 할머니 집에 온 듯한 기분은 1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농가 밥상에서도 느껴진다. 재료의 물성을 음미하며 배를 채우고 다음 와이너리로 향해본다.
까치락골 와이너리 임채만 대표(위)와 포도밭 뷰를 보며 먹을 수 있는 시골밥상(아래)
농부들의 땀과 만난 영천의 떼루아
영천에서 최초로 ‘농가 와이너리를 선보인 조흔 와이너리는 서울에서 귀농, 선대부터 포도 농사를 지어 온 곳에 서광복 대표가 2009년 지었다. 떼루아(Terroir: 토양과 기후조건 등 와인이 만들어지는 모든 환경)를 한번 찾아보자 해서 동서남북 지역에 22개의 품종을 다 심었어요. 채산성 없는 건 다 뽑아냈죠.” 수도를 끌어와야 할 정도로 허허벌판었던 곳에 지은 와이너리는 큰 손해를 입었던 화마도 극복한 상태. 포도밭에선 가끔 연주회와 팜 파티가 열리며, 루프톱에선 바비큐파티도 열린다. 무조건 일몰 시간에 방문할 것. 운이 좋으면 대표의 기타 연주도 들을 수 있다.
조흔 와이너리 서광복 대표
젊은 부부가 귀농해 만든 와이너리로, 건물 짓는 데만 1년 반이 걸렸다는 블라썸 와이너리는 일단 와이너리 건물이 아니라 갤러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 마을 여행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와인으로 만든 스킨 제품뿐 아니라 직접 과일을 잘라 병에 넣을 수 있는 샹그리아 체험 키트가 있다. 곰 모양 보틀은 선물용으로도 걸맞으니 잊지 말고 챙겨갈 것.
블라썸와이너리와 심정미 대표(하단)
‘복숭아와인으로 온라인과 보틀숍에서는 이미 유명한 고도리와인도 영천에 위치해 있다. 영천엔 매출 5000만 원을 넘는 곳이 대여섯 곳, 1억 넘는 곳은 더 적은데 저흰 10억 이상 매출을 내고 있지요. 자다가도 와인만 생각하면 벌떡 일어납니다. 수익의 많은 부분을 재투자하는 건 와인의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함이죠.”
최봉학 대표의 ‘술톤 붉은 코는 15년간 그가 와인 제조에 기울인 노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도리와인의 인기는 최 대표의 이런 철학과 함께,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다는 장점이 합쳐진 결과다. 고도리와이너리의 복숭아 와인을 품에 안고 마지막 와이너리로 향했다.
고도리와이너리의 포도밭
마지막으로 찾은 ‘We와이너리 건물 앞에는 ‘베를린 와인트로피 골드상 수상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의 피땀 어린 포도를 경운기에 싣고 땅고개 넘어 경매장으로 향하던 20살 대학생은 베를린와인트로피를 석권하는 와인 메이커가 되어 있다. 영천 와인으로 숙성시킨 돼지고기와 함께, 와인에 어울리는 닭고기 전과 감자전을 먹은 뒤, 와이너리 건물 옥상에서 한 해의 소망을 담은 종이 비행기를 날린다.
와이너리 투어를 하며, 제품을 사지 못했다면 십여 곳의 영천 와이너리 제품이 모두 모인 와인 터널을 주목할 것. 지난 4월 입구 벽면에 벽화 포토존을 설치하고 갤러리도 새단장한 와인 터널은 폭 4m, 길이 70m에 달하는 인공 터널로 연간 3만 명이 방문 중이다.
‘샤인 머스켓을 ‘사인머스켓이라고 발음하는 경상도 와인 러버들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영천 와이너리 투어. 이 겨울에 활력 넘치는 경북 영천으로 와인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글 박찬은 사진 박찬은, 영천시 영천와인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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