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이 하고 싶은 그곳
겨울 온천의 뜨끈한 위로
동아서점·완벽한날들·문우당서림 등 서점 맛집
겨울 온천의 뜨끈한 위로
동아서점·완벽한날들·문우당서림 등 서점 맛집
속초엔 바다와 회 타운만 있는 게 아니다. 척산온천이라는 좋은 온천이 있다. 온천하고 막국수 먹고 커피 마시며 느긋하게 이틀을 보내다가 왔다. 옛 조선소를 리모델링해 카페와 서점으로 꾸며놓은 곳에도 갔는데, 속초에서 한 달만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초에 처음 갔던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1989년. 수학여행이었는데, 울산바위 오르는 붉은색 철제계단을 줄지어 오르던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무척이나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울산바위에 올랐을 때의 풍경, 느낌 같은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신기하다.
두 번째 속초에 간 건 대학입시를 마치고 친구 다섯 명과 함께 떠난 3박 4일 여행이다. 설악동 앞 광장에 서 있는 커다란 이글루 속에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었고, 자그마한 택시에 여섯 명이 구겨져서 타고 숙소로 돌아온 것만 또렷하게 기억날 뿐이다. 사흘 동안 여기저기 명소를 돌아봤을 텐데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 어쩌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열여덟 살의 남자 아이들은 ‘무언가를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 나이에는 끼리끼리 어울려 함께 돌아다니면 무작정 좋다.
속초 해변의 아침, 속초 해안도로 아침 풍경
대학을 졸업하고 몇몇 직장을 거쳐 프리랜서 여행작가가 된 뒤에도 취재를 위해 속초를 몇 번 찾았다. 줄을 당기는 갯배도 탔고, 아바이 마을에서 오징어순대도 먹었다. 새하얀 접시 위에 담긴 오징어순대를 보며 ‘참 신기한 음식이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쓴 메모장을 찾아보니 오징어로 어떻게 순대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돼지가 귀해서 그랬을까” 하고 적혀 있으니까. 산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여행작가라 비선대와 천불동 계곡, 대승폭포에도 갔었다. 목에 카메라를 메고 슬렁슬렁 다녀왔던 것 같다.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이번 속초 여행의 목적지는 척산온천휴양촌이다. 속초 하면 으레 바다를 떠올리겠지만 이번엔 굳이 바다를 보지 않아도 좋다, 이렇게 생각하며 떠난 여행이다. 여유롭게 온천을 즐기고 막국수를 먹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빈둥댈 예정이다. 나이가 드니, 여기저기 쏘다니며 이것저것 챙겨가며 보는 게 영 쉽지 않다. 무엇보다 여행을 와서까지 굳이 바쁘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이젠 한 번 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주 사소한 것에서조차 느낀다. 지는 목련 잎에 낙심하고, 가는 여름이 아쉽다.지금의 척산온천은 1985년 새로 지었다. 맨발산책로에서 바라본 척산온천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날씨를 체크하는 건 오래된 습관이다. 그런데, 비가 온다. 서울은 쾌청하고 맑은데, 미시령 넘어 속초는 굵은 빗방울들이 날아다닌다고 했다. 그래도 괜찮다. 온천 하러 가는 길이니 말이다. 새벽에는 숨을 쉬면 새하얀 입김이 나온다. 요즘이 온천을 즐기기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척산온천은 설악산이나 속초 바닷가로 갈 때 몇 번 지나쳤다. 다소 오래된 듯한 건물을 보며 ‘역사가 제법 깊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온천 로비에 옛날 온천 건물 사진이 붙어 있는데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오래된 듯하다. 팔작 기와지붕을 올리고 페인트로 ‘척산온천이라고 쓴 간판을 달고 있는데, ‘1973 척산온천 휴양촌 옛 모습이라는 설명이 짤막하게 붙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85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작은 온천 건물 하나로 시작해 지금은 호텔과 대욕장, 찜질방 등의 시설을 갖춘 큰 온천장이 된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척산온천수로 족욕을 즐길 수 있다.
척산온천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땅이 얼지 않아 주변의 초목이 한겨울에도 푸른빛으로 시들지 않았고, 동네 아낙들은 뜨거운 김이 피어 오르는 웅덩이 주변에서 빨래를 했다. 이곳이 온천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인이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 해방이 됐다. 일본인은 돌아가면서 온천의 흔적을 매장해 버렸지만, 온천수를 추출하기 위한 발파 공사에 이후 성공하며 지금의 자리에 휴양촌을 세우게 되었다.음, 그렇다면 온천이 있다는 걸 직감한 일본이 아니었다면, 온천을 메우고 도망간 일본인 대신 온천을 개발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척산온천은 없었다는 말일 것 같은데… 만약 이 자리에 온천이 없었다면 아직 이곳의 초목은 겨울에도 푸를까, 하는 다소 쓸데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카운터에서 입장권을 끊는다. 입장 방법과 찜질방으로 가는 법을 설명해 주는 직원이 너무나 친절하고 능숙하다. 카운터 직원은 표만 끊어주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카운터인데, 여기서 직원의 친절과 프로페셔널함을 경험하면 업장에 대한 신뢰도가 확 높아진다. 온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직원의 모습에서 척산온천의 자부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척산온천 숲길
온천 안으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관리가 깨끗하게 잘 되어 있었다.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그니 비로소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여행지의 온천으로 직행하는 것이 요즘의 여행 루틴이다.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는 것이 현명한 삶의 태도다.척산온천은 온천수를 지하 400미터에서 끌어올린다고 한다. 용출 온도는 53.7℃. 온도가 부족한 곳에서는 물을 끓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척산온천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식혀야 한다. 그래서 물을 끓이는 과정에서 행여 기화될 수도 있는 성분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척산온천의 물이 좋다고 하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척산온천수는 불소와 라듐이 포함된 강알칼리성 온천이라 피부 세정 작용과 노폐물 제거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온천을 하고 나와 뭔가 잠깐 동안 피부가 매끈거린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지만 ‘오호! 효과가 정말 기막히군 하면서 감탄했던 적은 없었다. 그냥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 시간이 좋은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인생에 대한 낙관이 뜨거운 김처럼 몽글몽글 피어 오르는데, 그게 아마도 온천의 진정한 효능이 아닐까 싶다.
찜질방과 연결되어 있는 척산온천 휴양정과 내부
찜질방과 소나무 숲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다사우나에서 연결된 통로를 따라 가면 찜질방이다. 게르마늄방과 쑥찜질방, 옥찜질방, 수면캡슐방, 침대안마실 등을 갖추고 있다.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수면실과 침대 안마방도 있다. 들어서면 상쾌한 편백 향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찜질방 밖에 있는 황토 불한증막이다. 새벽 5시부터 소나무 장작을 쌓아 불을 지핀다고 한다. 찜질방에는 오래 있지 못하는 체질이라 한증막 위층에 자리한 휴양정으로 갔다. 일종의 전망대 격인데, 여러 개의 큰 창으로 속초의 상징인 울산바위가 보인다. 찜질복을 입고 바라보는 울산바위라니, 이런 호사가 없다.
찜질방에서 뒹굴다가 대욕장으로 다시 와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탕에서 솟아나는 김 위로 설악산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마 위로 가느다란 가랑비가 스친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어 본다. 척산온천휴양촌 옆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보기 좋으라고 대충 만들어놓은 숲이 아니다. 무려 3,600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숲에는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온천 후 기분 좋은 산책을 즐길 수 있다. 2.5km의 맨발 산책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자연석과 꽃들로 꾸민 석림원과 만난다.
온천 후에 먹는 막국수 한그릇과 수육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
온천 후의 구수한 막국수 한 그릇온천을 하고 나니 배가 출출하다. 속초에 왔으니 무조건 막국수다. 척산온천휴양촌에서 차로 5분 거리에 ‘범바위막국수가 있다. 면을 직접 뽑는 집이다. 여기까지 고민은 짧았는데 자리에 앉으면 갈등이 시작된다. 물? 아니 비빔? 갈등하다가도 언제나 나의 최종 선택은 비빔이다. 비빔막국수와 수육 작은 것 하나, 여기까지 왔으니 수육을 맛보지 않으면 서운하다.
반찬으로 무채와 백김치가 먼저 나온다. 비빔용 육수도 따로 내 주신다. 막국수가 나왔다. 삶은 계란 반쪽과 오이, 무, 김가루, 깨가 들어가 있다. 면을 비비는데 진한 메밀 향이 코끝으로 훅 끼쳐온다. 벽에 붙은 ‘맛있게 먹는 법에는 식초와 설탕을 조금 넣으라고 해놓았지만 내 경우 메밀 그대로의 맛이 좋다. 역시 사우나 후에 먹는 막국수에 비견할 만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수육도 잘 삶았다. 속초라 그런지 명태 회무침도 함께 나온다. 수육 위에 명태 회무침 한 젓가락을 얹어 먹으니 궁합이 좋다. 아참, 비빔막국수는 반쯤 먹다가 육수를 부어 먹는 것이 더 맛있게 먹는 요령이다.
넓은 마당이 있는 도평커피와 도평커피의 시그니처인 ‘팥크림커피(사진 좌측 아래)
막국수와 수육을 배불리 먹고 도평커피라는 카페로 향했다. 작은 마을 길을 따라 들어가면 기다렸다는 나타나는 예쁜 카페다. 실내 모든 곳이 포토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날 시골집을 카페로 꾸몄다. 넓은 마당 뒤에 하얀색 건물이 서 있다. 커다란 창으로는 시골 마을의 들판이 내다보인다. 도평커피의 시그니처는 팥크림커피다. 커피에 달콤한 팥크림을 띄웠다. 커피 아래쪽에는 팥앙금이 있어 커피를 다 마시고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된다. 마당에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평상도 놓여 있다. 본관 옆에 별관 건물에는 프라이빗 룸이 있다.물 좋은 온천에서 따뜻한 온천욕을 즐기고 막국숫집에서 메밀 향 진한 막국수를 먹었다. 지금은 가을 들판을 바라보며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인생에서 이런 순간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언제나 여행을 떠나오면 드는 생각이다. 그러니 여행은 언제나 옳다. 지금 내가 인생의 가장 좋은 순간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니까 말이다.
1956년 문을 연 동아서점
서점 다니고 생선구이 먹으며 슬렁슬렁
오래전부터 바닷가 도시에 살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다가 보이고, 주말이면 슬리퍼를 신은 채 돗자리를 들고 집 앞 백사장으로 가 샌드위치를 먹는 삶은 어떨까. 바닷가 도시에 여행을 갈 때마다 ‘이 도시는 어떨까, 이 도시에 살면 어떨까 주의 깊게 염탐한다. 그중 강원도의 몇몇 도시가 마음에 들었는데 가장 마음에 든 곳이 속초다.일단 속초에는 좋은 서점이 많다. ‘동아서점과 ‘문우당 서림 그리고 ‘완벽한 날들이다. 1956년 ‘동아문구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책과 문구를 같이 팔던 동아서점은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주인장 김영건 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키던 동아서점은 2000년대 이후 문을 닫을 정도로 어려워졌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다시 맡아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붐비는 서점 가운데 한 곳이 됐다. 동아서점에 진열된 책은 서적 권수만 해도 5만 권. 대표가 신문 리뷰와 SNS 등을 참고해 직접 주문한 것이다.
주인이 직접 선택한 좋은 책만 파는 동아서점
동아서점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문우당서림이 있다. 1984년 이민호 대표가 10평 공간에서 시작해 지금은 2층짜리 단독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속초 8만 시민 가운데 3만 명이 문우당서림 회원이라고 한다. 이민호 대표의 딸인 이해인 디렉터가 솜씨를 발휘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끈다. 동명동 터미널 뒤에 있는 ‘완벽한날들은 독립서점이다. 서점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하고 있다.책을 사 들고 칠성조선소로 갔다. 옛 조선소를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카페도 들어서 있고 서점도 들어서 있다. 2층, 바다가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지역 출판사가 펴낸 책 『동쪽의 밥상』(온다프레스)을 읽는다. 동해안에서 나는 식재료와 음식에 대해 지역 작가가 쓴 글이다. 가자미를 비롯해 다양한 생선과 명태식해 등 맛있는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책 속에 가득하다.
읽다 보니 배가 고프다. 생선구이나 먹으러 갈까? 속초에는 고등어와 꽁치, 오징어, 열기, 도루묵을 숯불에 구워 한 접시 가득 내준다고 하던데···. 서울에서 먹는 생선구이와는 차원이 다르겠지. 밥 먹고는 어디에 갈볼까? 영금정에 가서 파도소리나 들을까? 아니면 척산온천에 다시 가서 온천을 더 할까···. 짧은 여행에 아쉬움이 먼저 남는다. 속초에서 한 달만, 딱 한 달만 살았으면 좋겠다.
속초 여행 정보
척산온천족욕공원 사우나를 하거나 숙박을 하지 않아도 가볍게 족욕을 할 수 있는 척산온천족욕공원은 넓은 무료주차장도 있고 이용 요금도 없어 좋다. 필요하면 수건과 방석을 빌리면 된다. 대여료는 1,000원. 족욕공원에는 발을 담글 수 있는 물길이 만들어져 있고, 가운데 따뜻한 온탕이, 주변으로 야트막한 냉탕이 있다.속초 맛집 청호동 아바이마을 아바이순대가 유명하다. 함경도 향토 음식으로 돼지 대창 속에 돼지고기, 찹쌀, 우거지, 숙주 등으로 속을 채워 찐 순대다. 이조면옥, 단천면옥, 한양면옥은 속초 3대 면옥으로 불린다. 88순대국의 순대국도 유명하다. 생선구이집으로는 88생선구이, 영철네생선구이맛집이 맛있다. 속초751샌드위치는 홍게살이 가득 들어간 홍게살샌드위치를 판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6호(24.11.2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