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북한 금수저 출신이 탈북 결심한 이유? [형오살롱 26화]
입력 2024-08-26 14:14  | 수정 2024-08-26 15:40
북한 금수저 출신이 탈북 결심한 이유? [형오살롱 26화]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 인터뷰 인용 보도시 MBN 유튜브 'MBN 지하세계-형오살롱'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MBN에 있습니다.
* 형오살롱 전체 라이브 영상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행: 김형오 MBN 앵커
출연: 김금혁 / 전 국가보훈부 보좌관 (2012년 탈북)
김가영 / 탈북민 (장마당 세대, 2013년 탈북)

[전문]
○ 앵 커> 브로커한테 어느 정도 금전적인 돈을 줘야 되죠?

● 김가영> 네. 맞아요. 그래서 저희가 북한에서 중국 넘는 거는 그때 당시 금액이 천만 원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중국에서 받는 브로커가 사람 장사하는 브로커가 아니라, 저희 삼촌의 무역 파트너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비용을 안 받고 그냥 경비하는 국경 경비대원 돈 주는 것만 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우리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한 300만 원정도 들었고요. 그리고 중국에서부터 한국까지 오는 건 400만 원 정도 들었어요.


○ 앵 커> 어떻게 와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거는?

● 김가영> 중국에서 도착하면 또 한국에 있는 브로커들이 중국에 있는 브로커를 연결을 해줍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브로커를 먼저 이미 섭외 해가지고 언제 한국 갈 수 있다는 전화만 되면 그 사람들 제가 있는 위치로 데리러 오는 거죠.

○ 앵 커> 뭘로 와요? 비행기로 와요? 배로 와요?

● 김가영> 그 사람들은 중국에 이미 현지에 있는 현지 사람들이 브로커도 뛰는 거에요. 그러면 한국에도 브로커 한 명이 있고 중국에도 브로커 있고 북한에도 브로커가 있는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러면 저희는 한국에 있는 브로커에게 며칠 날 출발한다고 하면 중국에 있는 브로커가 택시타고 저희가 있는 집으로 데리러 오는 겁니다. 그럼 그 브로커의 안내에 따라서 저희는 비행기가 아니라 기차, 버스, 자가용 이렇게 타면서 교대로 바꿔바꿔 타면서 중국 코뮨까지 가게 되는 거죠.

○ 앵 커> 그러니까, 중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오려면 배를 타든가 비행기 둘 중

● 김가영> 그렇죠. 중국 코뮨까지 가죠. 중국 코뮨에 가면 라오스 브로커가 또 나옵니다. 그래서 라오스 브로커가 저희를 데리고 라오스 국경을 건너서 태국까지 보내주는 겁니다. 태국에서 30일 정도 이민국 수용소라는 곳이 있어요. 그 수용소에서 저희 납북 체류자로 있다가 대한항공 타고 태국 공항에서 올 수가 있습니다. 태국이 어찌보면

○ 앵 커>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서 이제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이군요.

● 김가영> 3국 거쳐서 오는 거죠. 중국, 라오스, 태국, 대한민국.

○ 앵 커> 그러면 태국에 도착하면 뭐 우리 정부에서 파견나간 기관들 있잖아요? 뭐 국정원도 있을 것이고, 대사관도 있고.

● 김가영> 네. 있죠.

○ 앵 커> 가서 신고를 해야 돼요?

● 김가영> 따로 저희를 안내해주고 어서오세요. 반겨주는 게 아니라 저희가 스스로 찾아가야 돼요. 대사관 아니면 태국 현지 경찰한테 찾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왔다고 얘기해주고 우리는 코리아 한국 가겠다고 얘기를 해주면 이미 다 체계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 경찰들이 바로,

○ 앵 커> 넘겨줘요?

● 김가영> 이민국 수용소로 넘겨주거든요. 이민국 수용소에 딱 가면 그때 대사관에서 나와서 저희를 안내해줍니다.

○ 앵 커> 그러면 이제 태국에 도착만 하면 이제.

● 김가영> 그때면 안도의 한숨을.

○ 앵 커> 90%는 이제.

● 김가영> 쉴 수가 있죠.

○ 앵 커> 안심할 수 있는 그런 단계군요?

● 김가영> 맞아요.

○ 앵 커> 태국에서 우리 대사관 사람들이나 우리 이제 뭐 국정원 직원이 됐든, 이런 사람들이 또 이렇게 선별작업을 해요?

● 김가영> 네. 왜냐하면, 탈북민을 가장하고 온 중국인도 있고 또 탈북민을 가장한 간첩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가 며칠 뒤에 간다고 하면 국정원에서 내려와서 조사를 합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북한사람이 맞는지, 아닌지의 확인 여부를 간단하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한 3시간 동안 조사를 끝나고 확인이 완료되면 며칠 뒤에 이름을 발표하면 그때 대한항공 타고 올 수가 있습니다.

○ 앵 커> 태국에서 대한항공 비행기 트랩으로 올라가서 딱 좌석에 앉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어요?

● 김가영> 저는요.

○ 앵 커> 영화 뭐 나오나 이렇게 좌석 뒤에 보면 영화…

● 김가영> 우리는 이제 너무 자연스럽게 영화봐야지하고 타지만, 저희는 비행기라는 거는 종이비행기만 봤었고요. 날아가는 비행기는 화면으로만 봤었기 때문에 비행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내가 앉아있다는 자체부터가 실감이 안 나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기억은 정말 어리벙벙? 내가 진짜 탄 게 맞는지, 비행기는 맞나? 이런 생각이 들만큼, 어리벙벙했는데요. 저는 좀 아쉬웠던 게 굉장히 컸어요. 그니까, 국정원에서 저희를 비행기를 한 10명 정도 태우거든요. 한 번에 다 태우는 게 아니고요. 한국사람들이랑 같이 이렇게 하기 때문에 주의사항을 줍니다. 여권을 딱 주면서 임시여권이죠. 그걸 주면서 조용히 있으라고.

○ 앵 커> 절대 옆에 사람들하고.

● 김가영> 대화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그러다 보니까, 또 한국처럼 우리처럼 이렇게 줄서서 입장하는 게 아니고 비밀통로로 몰래 입장을 하거든요.

○ 앵 커> 패스트 트랙이라고 아마 있을 수 있어요.

● 김가영> 그래서 저희는 여기도 불안하구나. 비행기 안에도 북한 간첩이 있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 해가지고요.

○ 앵 커> 그렇겠죠. 북한 사람, 북한 쪽에서 탈북자를 잡기 위해서 그 비행기 탔을 수도 있죠.

● 김가영> 그런 안내를 전혀 안 해주시니까. 분명히 다 한국말을 하는데 이 한국말은 북한 간첩이 한국말을 가장해서 한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안 잤는데, 너무 불안한 거에요. 그래서 기내식이 나왔는데 저희 주머니에 돈도 없다 보니까, 기내식을 먹으면 돈 내야 되는 줄 알고 못 먹겠는 거에요. 그리고 기내식 안에는 혹시나 또 약이 들어있지 않나. 라는 불안때문에 못 먹겠는 거에요. 그런데 주변에 한국사람들이 막 먹는 거에요. 근데 멀쩡한 거에요. 그래서 하나 먹어볼까? 하고 하나 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국정원 조사할 때 아니, 왜 당부할 때 기내식을 마음껏 드시라. 얘기 안 해주시냐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앵 커> 그러네요. 알겠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도착한 얘기는 잠시 내려두고 우리 보좌관님은 기숙사에서 탈출하고선 바로 우리 베이징 한국대사관을 찾아가신 건가요? 아니면 어떻게.

● 김금혁> 사실 저는 그렇게 하면 될 줄 알았죠. 과거에 탈북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었고 준비를 안 했었기 때문에 뭐. 브로커라던가 탈출 루트라던가 그런 것에 대해서 사전조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일단 탈출을 감행한 상태였고요. 그러다 보니까, 일단 대사관을 찾아가서 전화해서 북한 유학생인데 한국으로 정치적인 망명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다 만사형통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전화를 하니까 대사관 직원 분께서 만약 우리가 김금혁 씨를 데리러 나가면 그 자체가 국제법으로 납치가 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김금혁 씨의 어떤 자의적인 의사판단에 의해서 대사관으로 진입할 시에는 우리가 보호할 수 있지만,

○ 앵 커> 데리러 갈 수는 없다?

● 김금혁> '데리러 갈 수는 없다' 그러면 자의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냐. 라고 물어보니까 담을 넘어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가봤습니다. 담이 한 4m 정도 되더라고요. '이건 오지 말라는 소리구나' 라는 소리로.

○ 앵 커> 정문으로 이렇게 '똑똑'하고 들어갈 수는 없어요?

● 김금혁> 공안들이 이미 깔려있기 때문에

○ 앵 커> 중국 공안들이 또 지키고 있으니까?

● 김금혁> 네. 그렇죠. 중국 공안들이 그 앞에 깔려있고 저는 이미 그때 지명수배가 되어있던 상황이라서 북한이 제가 사라지자마자 지명수배 요청해서 당시 공안이 저를 찾고 있어서.

○ 앵 커> 북한 요원들도 우리 대사관 주변에 있었을 거 아니에요? 감시하고 있었을 거 아니에요.

● 김금혁> 그렇죠. 그때 제가 나중에 북경에서 탈북한 후배한테 얘기를 들어보니까 유학생들 3인 1조, 2인 1조로 팀을 만들고 또 보위부 요원들 팀을 만들어서 제가 갈만한 곳들은 다 가서 뒤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항이라든가 대사관이라든가 버스터미널이라든가 이런 곳이다 보니까 저도 그런 상황을 얼추 짐작은 할 수 있어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 하고 대사관에서 이제 빠르게 다시 돌아와서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이 이제 길이 없으니 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당시 베이징에 가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왕징'이라고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한인타운이 있습니다. 그 한인타운으로 먼저 건너가서 그 한인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냥 무작정 한인교회 문을 두드리고 북한에서 온 유학생인데 한국으로 가고 싶다. 근데 교회는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니까 이제…

○ 앵 커> 나를 신변보호해줄 수 있지 않냐.

● 김금혁> 도와달라. 신변 보호해주고 한국에 정보기관과 연결을 좀 시켜달라고 얘기했는데 한 9곳에서 다 거절을 당했고요.

○ 앵 커> 거절 당했어요?

● 김금혁> 거절의 이유가 사실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포교활동이 합법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합법이 아님에도 중국당국이 어느 정도 눈감아주고 있던 부분이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신들이 어떤 그런 예민한 문제에 연루가 되면 지금 그나마 하고 있는 이 포교활동도 못 하고.

○ 앵 커> 추방당할 수 있으니까?

● 김금혁> 그렇죠.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좀 힘들다고 정중하게 거절을 다 하셨고요. 대부분 비슷한 이유였고 저는 이제 끝인가보다고 생각이 들어서 망연자실 하고 있던 찰나에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제가 이제 거의 마지막 만찬처럼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었어요. 카드를 쓸 수가 없으니까.

○ 앵 커> 돈이 없잖아요.

● 김금혁> 현금 얼마 안 남은 현금으로 이제 피자 한 조각을 사먹어야겠다고 해서 피자헛 가게를 갔었는데 거기 어떤 한국인 남성분이 두 분이 앉아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분들한테 그냥 가서 무작정 '한국 사람인 것 같은데 아저씨들이 지금 나 안 도와주면 이제 난 죽는다. 북한으로 못 돌아간다. 이건 인류애적으로 도와 줘야된다'고 그냥 무작정 일단 말을 걸고 약간 시비를 걸었죠. 그 두분 중의 한분이 되게 웃으시더니 정말 북한 유학생이냐? 라고 하셔서 뭐 이 상황에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자기 사무실로 한번 가자는 거에요. 근데 그분이 이제 마지막 열 번째 교회 목사님이셨어요. 근데 그분이

○ 앵 커> 정말 운명적이다. 아까 말씀하신 그 중국인 도와주신 분도 운명적이고.

● 김금혁> 그분이 한 6, 7년 전에 동북삼성에서 선교사로 계시면서 탈북민들을 구출하고 보호하고 이런 일을 하셨던.

○ 앵 커> 해보셨던 분이구나.

● 김금혁> 네. 중국당국이 감시가 너무 심해지니까 이제 북경으로 옮겨왔던 분인데 제가 그분을 만난 거죠. 아주 우연치않은 기회에.

○ 앵 커> 정말 천우신조네요.

● 김금혁> 그래서 그분이 이제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연결을 시켜줘서 이제 극적으로 정보기관 사람들을 만나서 도움을 받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 앵 커> 우리 김가영 강사님 못지않게 정말 드라마틱한 그런… 탈북자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목숨을 내걸고 정말 드라마틱하게 넘어오신 경우가 좀 많은 것 같습니다. 근데 베이징대로 유학 갈 정도면 북한 내에서도 상당히 상류층, 고위층의 자제분이었을 거 아니에요?

● 김금혁> 자제라는 표현은 좀 그런 것 같고요. 그냥 태어나보니까 할아버지, 아버지, 할아버지는 특히, 이제 북한 조선 중앙당에서 일을 하고 있던 당 간부였고요. 그리고 아버지도 북한의 1세대 외화벌이 일꾼으로서 1990년대 말부터 중국 베이징과 평양을 오고 가면서 북한식, 우리가 흔히 보는 북한 레스토랑이라든가 북한 호텔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창업하시고 운영하시는 그런 기업인이셨고요. 그러다 보니까,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 그런 분들이셔서 저는 이제,

○ 앵 커> 소위 말하면 금수저죠. 우리 식으로 얘기를 하면.

● 김금혁> 그렇죠.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금수저죠.

● 김가영> 북한에서는 핵빨갱이고요.

● 김금혁> 그렇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까지 갔다가 북한 김일성대를 갔었습니다.

○ 앵 커> 그럼 북한에서는 최고의 서울대격 아니에요. 그렇죠?

● 김금혁> 그나마 제가 잘하는 게 아주 적은데 그나마 공부를 조금 잘하는 편이었어서 제가 김일성대 영어영문학과에 갔다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때 외교관 후보자로 선발이 되어서 유학을 나갔다가 거기서 이제 그렇게 된 거죠.

○ 앵 커> 그러면 북한에서 상당히 엘리트로 이렇게 뭐랄까. 키워진다고 해야 돼요. 육성된다고 해야 돼요. 그런 엘리트 코스를 밟는 중에 개혁개방에 대한 공부하던 것이 적발되고 이러면서 넘어오는 계기가 된 거군요?

● 김금혁> 그렇죠. 평양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물론, 평양에 있을 때 제가 어렸을 때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걸 되게 많이 봤음에도 이제 북한 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저의 어떤 시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변할 이유도 없던 것이 말씀하신 것처럼 금수저고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상태에서 태어나고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부모님들처럼 북한에서 잘 살고 살 먹을 것이니, 굳이 여기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더 이상한 그런 관계였고요. 그래서 북한에 있을 때는 사실 북한 정권에 대해서 그렇게 큰 불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교육하는 세뇌교육이라던가 충성심 교육이라던가 이런 것에 대해서 앞장서서 그것을 전파하는 그런 역할을 수행을 하던 사람이었고요. 충성 분자였죠. 근데 유학을 나가면서 느낀 것은 기존에 제가 알고 있던 북한이라는 모습 그리고 제 이미지, 제 머릿속에 있던 북한 정권에 대한 어떤 충성심, 그리고 북한 지도자들은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되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그런 개념들이 완전히 깨지게 되는 계기가 여러 차례 있었고요. 그 중의 하나는 사실 제가 처음 나갔을 때 제가 있던 반에 한국어 쌤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북한당국에서는 절대로 한국어 쌤들과 어떠한 접촉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교육을 하죠. 하지만 저는 나가 보니까, 제 또래 학생들이 너무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이제 되게 제가 알지 못하고 있던 부분. 예를 들어, 인권이라든가 자유라든가 그런 이런 단어들은 사실 북한에서는 너무나 생소했고 아예 개념 자체를 모르고 있던 단어들인데 그 친구들이 저한테 알려줬죠.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저한테 막 이렇게 몰아붙였어요. 너는 북한의 엘리트라면서 너네 나라에 대해서 뭐 그렇게 모르냐. 그런 비판들을 받으면서 저 스스로도 많이 공부를 좀 하게 됐고 인터넷에서 위키피디아에 김정일을 쳐보니까 저희가 절대 알 수 있는 여성편력 같은 것들. 고난의 행군 때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을 때 김정일은 호화요트를 구매하고 또 8억불에 달하는 금수산 기념궁전을 만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행위들이 과연 내가 정말 모르고 있던 행위들이었고 그리고 국가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는지 주민들이 저렇게 굶어죽는데 지도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호화스러운 삶을 누리면서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되게 화가 나더라고요. 모르고 지냈던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제가 당연하게 누리면서 살아왔던 것들에 대해서 약간의 죄스러운 마음도 들고 그런 것들이 합쳐지면서 뭔가 변화를 추구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앵 커> 우리 김가영 강사님께도 여쭤봤는데 그런 탈북 과정 중에서 가장 그래도 마음 속에 내가 이제 자유 대한민국으로 가야겠다고 하는 북한 김정일, 김정은 체제에 대한 어떤 실상을 좀 깨닫고 그 과정에서도 멈칫멈칫할 수 밖에 없는 요인들이 좀 있었을 것 같아요. 좀 가슴 아픈 얘기가 될 수 있지만 가족이라던지, 또 과연 내가 낯선 태어나지도 않은 대한민국이라는 곳에 가서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고. 그니까 멈칫멈칫하게 탈북하는 걸 포기하고 다시 돌아갈까? 아니면 이런 좀 어려웠던 뭔가가 있었을 것 같아요.

● 김금혁> 일단은 탈북을 결심하기 전까지도 가장 저의 발목을 잡고 있던 건 제가 이제 이 탈북을 함으로 인해서 그 사실관계가 명확해지면 한국으로 갔다는 사실관계가 명확해지면 북한에 남아있는 부모님들이라던가 혹은 저를 가르쳤던 스승님들이라던가 저와 함께 어떤 모의를 했던 친구들이라던가 이런 사람들이 이제 위험에 빠질 거라는 걸 사실 너무나 불 보듯 뻔한 그런 사실이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부모님에 대한 어떤 죄스러움, 그리고 이제 말씀하신 것처럼 북한에서는 모든 걸 가지고 누리고 살았는데 한국으로 가게 되면 속된말로 쥐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고 그때 막 스물 한 살밖에 안 됐고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결국은 사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봐도 지금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내릴 것이냐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 말고는 선택지는 없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 앵 커> 잘한, 또 가도 또?

● 김금혁> 네. 똑같이 그런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후회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 앵 커> 대단하십니다. 우리 김가영 강사님은 이제 그 힘든 과정을 거쳐서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한국에 딱 도착했습니다. 첫 대한민국 땅에 딱 도착했을 때 어떤 느낌이 좀 들었어요?

● 김가영> 저는 북한에서도 제가 저희만의 별명이 '드라마 빠순이'었거든요. 그만큼 드라마를 정말로 수 없이.

○ 앵 커> 한국 드라마?

● 김가영> 네. 한국 드라마.

○ 앵 커> 보기가 그렇게 쉬워요? 되게 어렵다면서요. 감시도 많이 하고 강한 처벌도 있고.

● 김가영> 정말 진짜 북한 아는 사람들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게요. 이걸 단속하는 사람이 더 잘 봅니다. 오히려. 간부들이, 집에 사모님들이 앉아서 마음 편하게 보고 있어요. 왜냐하면, 단속한 물건을 보고 다시 또 그냥 갖다 주니까요. 저희가 집안에 다 이렇게 그런 보위원, 안전원 이런 사람들 있다 보니까 되게 편하게 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 다리는 보위부에 넣고 볼 수밖에 없죠. 그런데 저는 조금 루트가 많아서 많은 걸 봤는데 그럼에도 그래서 그런지 인천공항에 딱 도착을 했는데요. 저는 공항이라는 거는 처음 봤어요. 처음 보다 보니까, 제가 제일 눈에 딱 들어왔던 거는 쫙 깔려있는 대리석이었습니다. 북한에서 대리석 보려면 김일성, 김정일 시신이 있는 곳에 가야만 대리석이 깔려있거든요. 근데 한국 공항에 딱 가는 순간, 대리석이 쫙 깔려있는 거에요. 너무 깨끗한 거에요. '한국이 이렇게 잘 산다고?'

○ 앵 커> 드라마에서 봤지만,

● 김가영> 내 머릿속에 대한민국은 '와 이 정도였어? 드라마가 진짜였네' 그러면서 딱 봤는데 대한민국 국민들 그 신발이 너무 깨끗한 거에요. 북한은 후진국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신발이 하얀 신발이 없어요. 다 흙탕물로 뒤집혀 있으니까.

○ 앵 커> 새까맣구나.

● 김금혁> 도로가 없다 보니까.

● 김가영> 네. 그럼요. 다 흙도로니까. 근데 우리 국민들 신발은 너무 깨끗한 거에요. 와 나 빨리 나가고 싶다. 빨리 이 도로에 나가서 보고 싶어. 이런 생각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딱 들었던 느낌은 마치 제가 잠시 어릴 때 살았다가 성인이 되어서 다시 돌아온 느낌 같은?

○ 앵 커> 늘 꿈꿨던?

● 김가영> 꿈꿨던 그런 데 온 것 같아가지고 너무 반갑고 신나고 그때 제 나이가 스물 세 살이었거든요. 91년 생이다 보니까. 그래서 어린 마음에 정말 그냥 빨리 궁금해. 나 이 사회가 너무 너무 궁금해.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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