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렇게까지 해봤다" MZ 탈북민들의 탈북기 [형오살롱 26화]
입력 2024-08-26 14:14  | 수정 2024-08-26 16:25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 인터뷰 인용 보도시 MBN 유튜브 'MBN 지하세계-형오살롱'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MBN에 있습니다.
* 형오살롱 전체 라이브 영상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행: 김형오 MBN 앵커
출연: 김금혁 / 전 국가보훈부 보좌관 (2012년 탈북)
김가영 / 탈북민 (장마당 세대, 2013년 탈북)

[전문]
○ 앵 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형오입니다. 최근 탈북-귀순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북한에 김주애가 후계자가 될 것이다. 이런 얘기도 좀 나오고 있고, 북한 소식들이 좀 궁금해져서 오늘 북한 관련된 두 분 좀 모시고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김금혁 전 보훈부장관 보좌관, 그리고 김가영 통일부 통일교육 강사님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 김금혁>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가영> 안녕하세요?

○ 앵 커>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좀 해야 얘기가 시작이 될 것 같아요. 먼저 우리 보좌관님.

● 김금혁> 네. 안녕하세요? <형오살롱> 시청자 여러분. 2012년에 한국으로 온 김금혁이라고 합니다. 91년생이고요. 평양 출신입니다.

● 김가영> 앞에 벌써 나이까지 밝히니까(웃음). 안녕하십니까? 저는 2013년에 북한 백두산에서 서울로 이사내려 온 '북한 애미나이' 김가영입니다. 반갑습니다.

○ 앵 커> '애미나이'요? '애미나이'는 여성을 뜻하는 말인가요?

● 김가영> 조금 우리 한국분들이 '애미나이'라는 그…

○ 앵 커> 약간 비하적 발언은 아니고?

● 김가영> 북한에서는 그런데 여기서는 애미나이라고 하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북한 여성을 만났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 앵 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분 잘 모르는데 우리 여성 피디들에게 이 애미나이야. 이러면 저는 절대 뭐라고 막 할 것 같은데?

● 김가영> 그렇죠.

○ 앵 커> 북한에서는 그게 편한 용어군요?

● 김가영> 네. 북한에서는 그렇게 하거든요.

○ 앵 커> 알겠습니다. 김 애미나이?

● 김가영>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애미나이라고 하면 조금 너무…사적인 자리에서만 에미나이라고 하죠.

○ 앵 커> 남자는 뭐라고 부릅니까?

● 김가영> 남자는 동무, 동지라고 하죠.

○ 앵 커> 아, 그냥 동무, 동지? 이름을 안 부릅니까?

● 김가영> 금혁 동지, 아니면 금혁 동무라고 하죠.

○ 앵 커> 그냥 금혁 씨라고는 안 하나요?

● 김가영> '씨' 자라는 발음은 자본주의 상징이어가지고요. '씨' 라는 표현을 잘 안 했었습니다.

● 김금혁> 최근에 '씨'라고 부르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의해서 잡혀가죠.

○ 앵 커> 진짜요?

● 김금혁> 네. '평양문화어 보호법'을 북한이 만들어가지고요. 청년 학생들 사이에 남한 드라마를 많이 보고 그 영향 때문에 남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빈번해지다 보니까,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이제 '오빠'라든가 OO씨라든가, 데이트라든가 등등 한국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를 사용할 시 이제 강한 처벌을 내리는 그런 법령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 앵 커> 그 기사를 제가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어요. 이렇게 이제 뭐 오빠라든, 언니 이런 호칭을 쓴, 동무라는 표현, 동지라는 표현 말고 그런 표현을 쓰면 처벌받는다. 이런 얘기였는데 실제 그렇군요?

● 김금혁> 네. 실질적으로 작년에 넘어온 친구들한테 제가 증언을 들어 보니까 그것 때문에 교화형 간 친구들도 여럿 있다고 했고.

○ 앵 커> 교화형이요?

● 김금혁> 네. 그리고 매우 강도 높은 사상 투쟁을 통해서 아예 그 정신 상태를 탈탈 터는 그런 탈곡기 수준까지도 지금 청년들이 이렇게 스스로 표현을 하고 있거든요. 완전히 지금 탈탈 털고 있다. 청년들을.

○ 앵 커> 근데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동무, 동지를 쓸 수 있지만 가족이나 아니면 연인 관계는 사적이잖아요? 누가 알겠어요. 내 파트너가 고발하지 않는 한. 그쪽 그런 사적인 관계에서는 충분히 뭐 '오빠' 이렇게 쓸 수도 있고 뭐 이름만 부를 수도 있고 뭐 그러지 않나요?

● 김가영> 충분히 그렇죠. 저 같은 경우에도 북한에 있던 애인이랑 '자기야' 라는 표현도 사적에서는 썼었고요. 밖에 나가서는 일체 아예 그냥 입을 딱 닫고 살았죠.

○ 앵 커> 근데 이게 습관이 돼가지고 '자기야. 자기야' 부르는데 갑자기 옆에 사람있는데도 '자기야'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잖아요.

● 김가영> 그게 우리처럼 편하게 '자기야'가 아니라 정말로 가끔 한번씩 이벤트식으로 '자기야'라고 했지, 오늘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선 늘 나오는 그런 멘트는 아니었습니다.

○ 앵 커> 자기야라는 표현은 굉장히 남조선식의 자본주의에 찌든 뭐라고 부릅니까? 불순분자?

● 김가영> 불순분자.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언어죠.

○ 앵 커> 보좌관님도 '자기야' 라는 표현 좀 쓰셨어요? 몰래?

● 김금혁> 저는 결혼을 한지 얼마 안 돼서요.

○ 앵 커> 결혼 했을 때도 써요. '여보야' 대신에 '자기야'고 부르는 사람들 많아요.

● 김금혁> 뭐 한국에서 결혼 했으니까 제 와이프는 '자기야'라고 부르지만 북한에서 제 '자기야'는 없었습니다.

○ 앵 커> 북한에서는 연애를 안 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아까 백두산에서 넘어온 애미나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이거 탈북 경로를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뭐 루트가 공개될 경우에는 사실, 그 이후에 차단 되잖아요? 그렇죠. 언론에 알려질 경우에는. 그래서 이제 보통 이제 탈북하신 분들이 루트를 비밀리에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 김가영> 저는요. 근데 북한에 있을 때 라디오 들으면서 왜 그 라디오 출연하는 탈북민들이 루트를 얘기를 안 해주는지 너무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한국이 어느 순간부터 루트를 물어보면 언제든지 얘기해줬습니다.

○ 앵 커> 그게 막히잖아요? 알려지면.

● 김가영> 솔직히 루트는 한 개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여러 곳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감시망이 그렇게까지 막 촘촘하진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루트를 얘기해줌으로서 그 사람들이 그 근방으로 조금 좁아지는 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저는 루트를 항상 얘기를 해줍니다.

○ 앵 커> 어떻게 그러면 원래 고향은 어디세요?

● 김가영> 저의 고향은 혹시 양강도라고 하실까요?

○ 앵 커> 예. 많이 들어봤죠.

● 김가영> 함경도 옆에 있는 양강도.

○ 앵 커> 북쪽이네요?

● 김가영> 네. 북쪽이요. 백두산에 바로 근접해있습니다. 양강도는 압록강 국경이 되어있다 보니까, 압록강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거든요.

○ 앵 커> 그렇죠. 밑으로 내려와가지고 휴전선이나 이런 쪽을 넘어오기는 불가능하죠.

● 김가영> 불가능하죠. 그래서 압록강을 도강을 해야 되는데 압록강이 워낙 높다 보니까, 그곳에서 촘촘하게 보초가 서 있는 곳은 경비가 심한 곳은 못 가고 조금 산 쪽으로 가면 경비가 없어요. 그 쪽에는. 그러다 보니까, 산을 한 세 개 정도 타야 되는 거에요.

○ 앵 커> 밤에?

● 김가영> 네. 밤에. 저희가 한 6시 정도에 출발했는데 강에 딱 도착하니까 새벽 4시인가 됐더라고요?

○ 앵 커> 저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몇 명이?

● 김가영> 아, 저랑 저희 사촌언니랑 이모랑 이렇게 세 명이서.

○ 앵 커> 세 명이서?

● 김가영> 네.

○ 앵 커> 밤에 산을 세 개를 넘은 거에요?

● 김가영> 네. 근데 뭐 산이라고 하면 우리처럼 산책가는 산이 아니라요. 정말로 가파른 백두산 산은 굉장히 가파릅니다. 그래서 제가 넘을 때 당시 11월이었거든요? 백두산 눈이 허벅지까지 내려와요. 그래서 그 눈이 꽉 덮여있는 산을 정말 오르고 내리고 하는 산을 세 개를 넘는데요. 저는 산은 오를 때만 힘든 줄 알았는데 내려갈 때가 더 힘들더라고요.

○ 앵 커> 그럼요.

● 김가영> 예. 그래서 정말 몇 번은 구르고 중간에는 그냥 포기한다고 했었는데 이모가 딱 한 마디 하더라고요. '죽더라도 자유의 맛을 한번 딱 보고 죽으면 안 되겠냐, 이모 소원이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일어나가지고 힘을 내서 나갔는데 그 강가가 좁은 강가도 있는데 제가 넘었던 강은 허벅지까지 물이 물살이 흐르는 그런 깊은 강이었어요.

○ 앵 커> 엄청 차가웠을 텐데 그 계절이면 얼어있을 수도 있고.

● 김가영> 네. 맞아요. 살얼음 막 껴있고요. 그때 제가 딱 들어가는 순간, 여기서 죽겠네. 라는 생각이 들만큼.

○ 앵 커> 너무 차가우니까?

● 김가영> 수십 개의 바늘이 저희 다리를 막 찌르더라고요. 그래서 옷을 또 벗어야 되더라고요? 무거우면 빠질 수가 있다고 그래서 아예 맨 몸, 맨 살에 이렇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 김금혁> 11월에?

● 김가영> 속옷만 입고 옷은 몸에다 감고 딱 들어가는데 그래도 이모가 맨 위에서 저희를 막아주는 거에요. 그 물살을. 그러면서 저희가 뒤를 가는데 아무래도 이모가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까 바로 쇼크가 와가지고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소원을 빌어봤습니다.

○ 앵 커> 저체온 쇼크가 왔구나.

● 김가영> 네. 아무래도 쇼크가 오고 저 또한 쇼크가 왔고 근데 이모가 쇼크 오다 보니까 이모를 막 먼저 회복하고 딱 봤더니 중국 브로커 집인 거에요. 근데 봤더니 손발톱이 다 동상입어서 새까맣게 되고 얼은 거에요. 그래서 그게 회복되는 게 한 3개월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중국에 숨어있으면서 중국에서 그 다음에 한국 갈 생각을 했었죠. 저는 중국가면 비행기가 데리러 오는 줄 알았는데.

○ 앵 커> 편안하게?

● 김가영> 예, 예. 그래서 한국을 편하게 가는 가보다 했는데 그때부터 또 한 번의 고비더라고요. 중국에서는 탈북민을 딱 보면 바로 북송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또 그런 고비를 넘겨서 저희가 정말 어렵게, 근데 제가 올 때 당시에는 내가 제일 어려웠다고 생각했는데요. 한국에 오니까 저보다 몇 십 배로 어려웠던 분들이 많이 계시고, 또 어느 가정에서 가족이랑 헤어지고 또 북송당하고 이런 사고도 많은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감히 탈북민들 앞에서는 입을 못벌립니다.

○ 앵 커> 아, 그렇구나. 우리 보좌관께서는 어떻게 어디에, 평양에 있었다고 그랬고, 어떤 경로로 오셨습니까.

● 김금혁> 사실, 저야말로 탈북민들 앞에서 어떤 탈북기를 얘기하는 게 참으로 민망하고 참 죄송스러울 때가 있는데요. 저는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겪어야 했을 그 도강의 위험이라던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라던가 그런 것들은 사실 경험은 못 했고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베이징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유학생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베이징대에서 유학을 하다가 이제 북한 체제에 대한 배신감이라던가, 반감이라던가 그리고 또 그 저희가 나름 유학생들끼리는 우리가 나중에 좀 장성해서 북한 체제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가 오면 개혁개방이라던가 여러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취해서 북한을 좀 살기 좋은 나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서로 삼삼오오 모여서 공부를 하던 그런 그룹이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그 그룹 활동이 북한에게 발각이 되면서 이제 어떻게 보면 반체제활동으로 낙인이 찍혀서 어디든지 도망가지 않으면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받아야 되는 그런 운명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서 그때 2012년 2월에 기숙사를 탈출을 했고요. 그리고 탈출을 해서 저는 비행기타고…

○ 앵 커> 알겠습니다. 참 드마라틱하네요. 두 분 다. 보훈부장관 보좌관을 했다는 데 우리 국가 보훈부 장관 보좌관을 말씀하시는 거죠?

● 김금혁> 예. 그렇습니다. 박민식 초대 국가보훈부 장관님을 보좌해서 정책보좌관으로서 작년 12월까지 일을 했었고요.

○ 앵 커> 그러면 탈북민 가운데 태영호 국회의원도 계시지만, 굉장히 공직으로 올라가신, 높은 곳으로 올라가신 유일한 분인가요?

● 김금혁> 아니요. 5급 사무관이라서 물론, 5급 사무관도 우리 공무원 사회에서는 하나의 주축으로 볼 수 있지만 저는 어떻게 보면 조금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 앵 커> 왜 보훈부장관 보좌관을 했을까? 그니까, 박민식 의원이 정치인이니까 그런 인연도 좀 있는 건가요?

● 김금혁> 박민식 장관님과의 어떤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고요. 그리고 보훈했을 때에는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지금 현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게끔 수많은 희생이라던가, 또 수많은 분들의 그런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그런 노고가 다 깃들어져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분들의 어떤 숨겨진 노고를 우리가 찾아내고 발굴하고 또 조명을 해서 우리가 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되는지 우리 후대들에게 알려줘야 되는 것이 보훈업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관련해서 사실, 저는 대한민국에 왔을 때부터 제가 자유민주주의에 기여한 바는 없지 않습니까. 이미 발전된 나라였고 또 이미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 진 상태에서 탈북민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많은 수혜를 입은 존재들이란 말이죠.

○ 앵 커> 저도 기여한 거 없어요(웃음). 자유민주주의 알잖아요. 그냥 태어났더니 여기 대한민국이었고 그냥 누린 거죠. 뭐. 그렇게 크게 막 저도 뭔가를 했다고 생각 안 들어요.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뭐 크게 의무감이라던지 그런 거를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 김금혁> 그래도 약간의 부채의식 같은 건 있고요. 그래서 제가 기여한 바는 없으나, 앞으로 기여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찾아보다가 보훈업무가 상당히 중요하고 또 이 보훈이라는 것이 우리 6·25 전쟁 또 이제 독립운동하신 분들이나 그분들의 어떤 업적을 기리고 또 그분들의 정신을 우리 앞으로 미래세대에 투영하는 일을 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그 일을 선택했습니다.

○ 앵 커> 제가 앵커를 좀 오래 했는데 그러면서 사실 꽤 오래전에도 그렇고 이렇게 탈북하신 분들을 방송에서 많이 인터뷰를 했어요. 근데 두 분을 보니까 그 당시의 탈북해서 제가 인터뷰했던 분들하고 완전히 달라요. 지금. 느낌이 정말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네? MZ 탈북민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좀 들어요. 왜냐하면, 그 분들은 군 출신들이 좀 많았고 그리고 이제 여러 가지 표현이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좀 쉽게 말하면 올드하다고 해야 되나요? 그랬는데 지금 두 분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굉장히 북한의 신세대분들이 탈북하셨구나. 이런 생각이 좀 듭니다. 조금 더 이어가서 중국으로 그렇게 이게 좀 아픈 얘기일 수도 있는데 중국으로 이제 도강,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가서 브로커 집에 있다가 대한민국으로 오는 그 과정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에요?

● 김가영> 아무래도, 이게 목숨과 관련되어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 앵 커> 발각 될 위험?

● 김가영> 네. 발각되면 저만 죽는 게 아니라, 북송되었을 때 북한에 남아있는 모든 가족들 다 죽기 때문에.

○ 앵 커> 아니, 탈북하는 순간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도 다 처벌받지 않아요?

● 김가영> 그래도 그 처벌수위를 따진다고 하면 조금 처벌수위가 낮죠. 근데 잡히는 순간은 한국행이라는 것이 확정이 되기 때문에 그 때부터는 처벌이 정치범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정치범 수용소라던가 아니면 공개처형까지 가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커서 제 손에는 항상 한 쪽 손에는 면도칼, 한 쪽 손에는 수면제 200알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들고 오다가 정말 잡히면 우리 세 명 다 먹고 죽자는 마음으로 저희가 왔었기 때문에.

○ 앵 커> 아름다우신 외모와 다르게 굉장히 독한 성격을 갖고 계시네요?

● 김가영> 왜냐하면, 저희 그 집안이 그냥 솔직히 뭐 북한정권에서 출세도 못 하고 이런 집안이면 또 괜찮겠지만 제가 돌아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를 이루어놓고 저희 때문에 한 다는 건 너무도 미안한 일이었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가장 저희가 정말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위험한 고비도 많았는데 중국에서는 항상 이런 감시, 통제를 북한이랑 거의 비슷할 정도로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 앵 커> 중국에서도요?

● 김가영> 네. 매 역 마다 신분증 검사하고 차표 검사하고 이런 거는 정말 거의 습관화 되어 있어가지고 중국 사람들은 당연히 보여주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중국은 좀 괜찮겠지라고 생각을 안도의 한숨을 했는데 그래도 중국도 똑같다는 것을 느끼고 그 다음부터 압박감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중국 버스에 탔는데 한국까지 가려면 국경을 통과해야 되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든요. 근데 버스에 딱 올랐는데 공안이 올라온 겁니다. 저에게는 신분증이 없어요. 차표밖에 없어요. 근데 그때 당시 이모랑 언니, 저 세 명 다 따로 따로 탔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때 그냥 죽었구나. 정말.

○ 앵 커> 붙잡혔구나?

● 김가영> 예. 그래서 이 자리에서 사용을 해야 되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제 옆에 앉아있던 남성분이 제 고개를 자기 어깨에 툭 기대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 앵 커> 아, 중국 사람이?

● 김가영> 모르죠. 무슨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죠.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기댔더니 자기 차표를 보여주면서 달라고 제 거를. 그래서 제 걸 줬어요. 근데 이제 공안이 오니까 전 눈 감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막 뭐라뭐라 하더니 딱 한 마디만 알아들었어요. '내 여자친구다' 아파서 누워있다는 식으로 얘기 했었어요. 그 공안이 그냥 차표만 보고 가는데 저는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는 거에요. 이 사람이 더 무서운 사람이면 어떡하지? 장기매매. 중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 앵 커> 호의를 베푼 사람이 오히려 더 위험한 사람일 수 있다?

● 김가영> 그렇죠. 그래서 눈 뜰 수가 없는데 눈을 뜨라고 하더니 너 북한에서 온 여자지? 이러는거에요. 그래서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

○ 앵 커> 아니라고? 부인했군요?

● 김가영> 네. 아니라고 했더니 한국 미디어를 보고 있더라고요. 핸드폰으로. 그리고 가방에는 한국말 공부책이 있더라고요. 한국에 유학오고 싶어하던…

○ 앵 커> 중국 사람이?

● 김가영> 네. 중국 학생인 거에요. 되게 어린 친구였던 거에요. 그래서 다행히도 그 친구의 도움 받아서 브로커 있는데 ㅜ까지 내렸는데 브로커한테 자기 명함을 주면서 한국 무사히 가면 꼭 연락하면 좋겠다고. 자기가 유학을 한국에 갈 계획이다고 얘기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때 명함을 제가 보관했어야 되는데 이렇게 무사히 올 줄 알았더라면.

○ 앵 커> 방송을 통해서 만약 그 분이 지금 한국에 유학와있다면 연락 할 것 같은데요?

● 김가영> 10년 지났는데 이제는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앵 커> 이게 뭔가 죽음의 생사의 문턱에서 만난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거죠. 그건 잘 모르겠네요.

● 김가영> 솔직히 지금까지 정말 많은 도움이 있었지만 저는 그 분의 도움이 가장 컸고 가장 잊지 못하고 나중에라도 정말 제가 유튜브 할 때 마다 항상 얘기하는데 그 분이 보고 찾아온다면 정말로 얼마만큼 보답해야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너무너무 고마웠던 그런 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중국 사람들 안 좋은 이미지가 있지만 저에게는 중국 사람들 너무너무 좋은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 앵 커> 그분 때문에? 정말 생명의 은인이네요.

● 김가영>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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