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Travel] 순천 저전마을 걷다 보면...딱 한 달만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입력 2024-07-11 16:34 
저전마을 산책의 출발점인 저전성당
정원마을로 거듭난 순천 저전마을
산책하는 여행

순천 저전마을은 일명 ‘정원마을로 불린다. 집 대문 앞, 담벼락, 모퉁이마다 작은 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계절마다 다른 꽃을 심고 정성 들여 가꾼다. 골목을 따라 걸으며 이 다정한 정원들을 만나다 보면 이곳에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피어 오른다.
산책에 관하여
인간이 발명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을 꼽으라면 뭘까. 증기기관, 바퀴 등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산책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인류의 많은 지성과 철학자, 작가들이 산책을 통해 영감을 얻었고 작품을 썼다.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라 말했다. 칸트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칸트는 매일 오후 5시, 퀘니히스베르그 마을 길을 산책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과 야스퍼스, 막스 베버, 괴테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당대의 철학자들도 산책을 하면서 의견을 펼쳤기에 ‘소요학파란 이름까지 얻었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 다산초당에서 강진 백련사까지 오솔길을 걸으며 ‘목민(牧民)을 생각했다.
장 자크 루소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산책이 명상과 지적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그는 산책을 통해 사색에 빠졌고 성찰했다. 산책을 통해 길어 올린 생각은 그의 철학적 사유로 발전했다. 자서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내가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그렇게 많이 존재하고, 그렇게 많이 나 자신일 수 있었던 것은 혼자 걸었던 여행 중이었다”라고 했는데, 이는 산책이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성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일 것이다.
나는 걷고 있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 멈추면 생각이 멈추고, 다리와 함께 내 정신이 움직인다”는 그의 말은 산책이 단순한 신체 활동이 아니라 개인적, 지적 성장을 위한 깊이 있는 도구임을 보여준다.
나 역시 지금까지 많은 책을 썼는데, 산책과 도서관이 상당히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산책을 하며 문장을 떠올렸고, 그 문장을 잊지 않기 위해 산책을 하는 내내 입 속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 문장은 맑은 생수처럼 내 정신을 적셔주었고, 때로는 마중물처럼 다른 문장을 길어 올려 주기도 했다. 내게 산책은 글쓰기였고, 독서였고, 여행이었다.
(위)벽화가 그려진 저전마을의 집 (아래)저전마을 곳곳에는 마을 주민들이 손수 만든 정원이 숨어 있다.
저전동을 걸으며
앞에 쓴 이 문장들 역시 모두 걸으면서 떠올린 것이다. 나는 이 문장들이 달아날까 봐 얼른 휴대폰에 메모했다. 내가 걸은 곳은 순천에 자리한 저전동 마을인데 아주 한적하고 고요한 곳이다. 낮은 지붕의 집들 사이로 골목길이 펼쳐져 있다. 누군가 방금 청소해 놓은 듯 깨끗한 골목, 걷다 보면 하늘 한쪽에서 날아온 새소리가 발치에 떨어진다. 지금은 장미가 가득 피었다. 분홍색 붉은색 장미가 대문과 담장을 넘어 등처럼 골목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장미뿐만이 아니다. 저전마을 골목을 걷다 보면 유난히 꽃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된다. 대문 앞이며 담벼락, 모퉁이마다 어김없이 꽃이 있고 화분이 놓여 있다. 한두 평 공터라도 있으면 해바라기를 비롯한 꽃들을 소복하게 심어 놓았다. 꽃만이 아니라 상추와 대파도 심었다.
그런 자리마다 예쁜 푯말이 서 있는데, ‘빗물 가로정원, ‘한 평 정원, ‘골목정원, ‘건강정원, ‘세모 정원, ‘숲 먹거리 정원, ‘저전성당 역사정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골목을 돌 때마다 마주치는 이 예쁜 정원 때문에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좌)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건강정원 (우)마을 모퉁이에 자리한 이웃사촌정원
저전동은 ‘정원마을로 불린다. 마을의 크기는 약 97만㎡(약 29만 평). 그리 큰 규모의 마을은 아니다. 하지만 이 동네에 정원만 16개에 달한다. 순천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정원이 있다. ‘순천만 국가정원이다. 순천만 국가정원을 관(官)이 주도해 만들었다면, 저전동 마을정원은 ‘민(民)이 조성했다.
저전동 마을정원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2018~2022년 저전동 3·4통 일원을 대상으로 일반근린형(뉴딜사업) ‘비타(Vita)민(民) 저전골 사업을 진행했다. 이때 ‘저전 나눔터를 비롯해 마을 공·폐가를 리모델링한 임대주택(청년 셰어 하우스)과 숙박시설(마을 호텔) 등이 들어섰고, ‘테마포켓정원과 ‘이웃사촌 정원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정원이 마을 곳곳에 만들어졌다.
저전마을이라는 이름은 닥나무에서 비롯됐다. ‘닥나무 저(楮) 자와 ‘밭 전(田) 자를 쓴다. 옛날에 이곳에 닥나무가 많았고, 닥나무가 종이의 원료가 되니 제지 산업이 발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을 걷다 보면 ‘아, 여기서 한 달 정도만 딱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 곳곳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보랏빛 향기 정원, ‘오월의 정원 등이 연이어 나온다. 허리를 숙여 정원에 핀 꽃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꽃 한 송이가, 화분 하나가 마을을 이토록 다정하게 채색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위로부터) 저전마을 먹거리정원과 여유로움이 넘쳐나는 저전마을. 방문객이 쉬어갈 수 있도록 벤치도 만들어 놓았다. 마지막 사진은 냇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이웃사촌 정원이란 이름도 자주 눈에 띈다. 이웃사촌 정원은 개인 사유지에 있지만 마을을 찾은 방문객도 구경할 수 있는 정원을 뜻한다. 마을에는 모두 7개의 이웃사촌 정원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서로 ‘꽃 나눔을 하고, 꽃 관리 노하우도 공유한다.
골목에는 예쁜 벽화도 그려져 있다. 과한 수준이 아니고 딱 보기 좋은 만큼이다. 아마도 이 골목의 주인이 꽃과 정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꽃을 보며, 벽화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남승룡 정원과 만난다. 저전마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3위를 한 남승룡(1912~2001) 선수의 출생지이다.
그리고 발걸음은 저전 성당까지 닿는다. 이곳은 100년 역사를 품고 있는 순천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이다. 성당도 도시재생 사업에 참여해 높은 담장을 허물고 성당 옆길을 새로 텄다. 유휴 공간을 마을 방문객을 위한 무료 주차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성당 앞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위로부터)저전마을은 마을 전체가 정원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다. 마을에 자리한 카페 전경이 눈에 띈다. 마을 끝에는 먹거리 골목도 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약 1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개천 옆 원두막에 노인 네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마을이 너무 이쁘다고 말씀드리니 탤런트 최수종·하희라 부부도 열흘 넘게 머물다 갔다고 하신다. 이렇게 천천히,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걷고 있으면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든 것 같아 기분이 흡족하다.
여행은 갑자기 가는 것이 좋고, 여행에서는 정해진 것 없이 자유롭게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 바다 위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노을을 바라보거나, 강물 위를 유유히 헤엄쳐 가는 백조를 바라볼 때, 담장 너무 풍성하게 핀 장미를 볼 때면 무언가를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살면서 ‘그냥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이런 때이지 않을까.

지금 저전마을에는 찬란한 여름 햇살이 쏟아지고 있고, 개울물 소리가 귓전으로 명주실처럼 흘러 들어온다.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새소리를 듣고 있다. 손에는 차가운 물이 들려 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달리고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니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는데 말이다. 인생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앞에 잠시 멈춰 서는 순간이 필요하다. 나는 저전마을에서 어느 여름을 한껏 즐기고 있는 중이다.
(좌)여름 꽃들이 화려하게 핀 순천만국가정원 (우)모네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습지공원
순천을 조금 더 걸었다
순천만 국가정원으로 왔다. 옛날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기온은 30도를 훌쩍 넘었다. 파도 소리 시원한 바다도 좋지만, 이젠 진한 숲 내음를 맡으며 나무 그늘 아래를 거니는 것이 더 좋다.
순천만을 처음 찾은 것은 1998년이었다. 철새 취재차 갔다가 거대한 갈대밭에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전남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자리한 순천만. 행정적으로는 순천시 인안동, 대대동, 해룡면 선학리와 상내리, 별량면 우산리, 학산리, 무풍리, 마산리, 구룡리로 둘러싸인 북쪽 해수면을 일컫는다. 세계 5대 연안 습지 중 하나이며 연안습지 중 최초로 ‘람사르 협약에 등록되기도 했다.
순천만을 알게 된 계기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그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고, 그의 대표작의 무대가 된 순천만은 꼭 한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게 찾은 순천만. 새벽안개가 점령한 우윳빛 갈대밭은 김승옥의 소설에 나오던 그대로였다.
순천만국가정원 메타세쿼이아길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무진기행』 中)

이후 자주 순천만을 찾았다. 그동안 순천만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한때 마구잡이로 식당이 들어섰고 단체 관광객으로 어수선했던 갈대밭은 깨끗하게 정비되고 자연생태관이 들어섰다. 그 사이 순천만을 찾는 철새도 많이 늘어났다. ‘국가정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은 공원도 생겼다.
순천만 국가정원 서문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만난 습지는 여름 햇살 속에서 눈부신 색상으로 반짝이고 있었는데 마치 모네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동문 쪽으로 가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걷다가 다시 서문으로 나왔다.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입장료 1만 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연간 입장권도 팔고 있었는데, 순천에 산다면 연간 입장권을 사 이곳에 매일 오고 싶을 정도였다. 짙은 메타세쿼이아 그늘 속을 걸으며 나는 다음 책을 구상했고, 몇 개의 문장을 얻었다. 산책은 우리가 생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위)선암사 풍경 (아래)순천만국가정원 여행객들을 위한 파라솔 그늘이 마련돼 있다.
걷기 좋은 숲길을 가진 절
순천에는 꼭 가봐야 할 절이 있다. 바로 선암사와 송광사다. 두 절은 조계산을 끼고 있는데, 동쪽 자락에는 선암사가, 서쪽에는 송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선암사를 찾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절이다. 백제 성왕 때인 529년 아도화상이 세운 고찰로 태고종의 본산이다.
선암사는 절도 절이지만, 매표소에서 절까지 이어지는 숲길이 너무 좋다. 이팝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 팽나무, 조팝나무, 산딸나무, 느티나무가 우거진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승선교가 있다. ‘선녀들이 승천한다는 뜻을 가졌는데, 아치형의 다리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답다.
승선교의 그림 같은 풍경
승선교를 지나면 아담한 절이 나타난다. 빛바랜 기왓장, 모서리가 닳아 둥그스름해진 돌계단, 바람이 불어 풍경이라도 울리면 마음 한 구석이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대웅전은 절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지만 단아한 느낌을 물씬 풍긴다.
선암사의 또 다른 명물은 해우소다. 우리나라 사찰 재래식 해우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화장실이다. 그 생김새부터가 눈길을 잡아 끄는데, ‘정(丁) 자형으로 우아하게 들어앉은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생긴 화장실답다. 정호승 시인은 ‘선암사라는 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여행 정보
쌍암기사식당의 김치찌개
선암사 앞에 장원식당, 길상식당, 선암식당 등 산채를 내는 집들이 있다. 선암사 가는 길 쌍암기사식당과 진일기사식당도 백반을 푸짐하게 차려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쌍암기사식당은 뷔페식으로 바뀌었다. 순천 웃장은 1920년 조성된 전통시장이다. 웃장의 국밥집들은 선술집 형태의 국밥집으로 운영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순천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제일식당과 향촌식당, 쌍암식당, 황전식당, 순복식당, 백가네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38호(24.07.1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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