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학자들 "사도가 세계 최대 금산지라고 말할 근거 없어"
'사도(佐渡) 광산'에 대해 유네스코가 '강제노역도 설명하라'는 취지 권고를 내린 가운데 지자체 당국이 36년 전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고 아사히신문이 15일 또다시 지적했습니다. 사도 광산은 일본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입니다.
진보 성향 유력 일간지인 아사히신문은 이날 '사도 광산 PR 사실은 어디까지'라는 기자 칼럼에서 "36년 전 니가타현이 낸 '니가타현사(史)'는 일찍이 조선인이 강제 연행돼 사도에서도 일했다고 적었다"고 밝혔습니다.
니가타현이 1988년 펴낸 '니가타현사 통사편8 근대3'에는 "쇼와(昭和) 14년(1939년)에 시작된 노무동원 계획은 명칭이 '모집', '관(官) 알선', '징용'으로 바뀌었지만, 조선인을 강제적으로 연행했다는 사실에서는 같다"라는 기술이 있습니다.
니가타현사에 조선인 강제동원 관련 내용이 있다는 사실은 앞서 언론 보도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은 재작년 2월 니가타현사에 등장하는 조선인 강제 연행 기술을 언급하면서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이라고 해도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일본 정부로서는 불편한 공적 역사책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일본은 사도 광산 유산 시기를 에도시기가 중심인 16∼19세기 중반으로 한정해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 등 전체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는 지난 6일 공개된 심사 결과에서 "전체 역사를 현장 레벨에서 포괄적으로 다루는 설명·전시 전략을 책정해 시설과 설비 등을 갖추라"고 주문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코모스가 요청한 여러 사항 중 에도시기 이후 유산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을 제외하라는 권고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이코모스가 권고하고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전체 역사 반영'에 대해서는 명확한 방침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와 성실하고 부단하게 정중히 논의해 나가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일부 시민단체는 일본 정부가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할 때부터 강제노역을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습니다.
시민단체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는 지난 12일 니가타현 지사 등에게 니가타현립 문서관에 있는 '반도 노무자 명부' 공개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단체는 "전체 역사 설명과 전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반도 노무자 명부"라면서 1983년 니가타현 지역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촬영한 명부 마이크로필름을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한편, 아사히는 칼럼에서 사도시 전시 시설 등에 게시된 일부 표현에 대해 "역사 전문가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17세기 세계 최대 금 생산지', '사도의 금은 세계에서 유통', '네덜란드인은 대량의 사도 금화를 입수'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에 대해 일본사 연구자인 스즈키 야스코 하나조노대 교수는 아사히에 "국외로 나간 금에 사도 생산품이 포함됐을 가능성은 있지만, 네덜란드인이 사도 금화를 대량으로 입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일본사 연구자인 오카 미호코 도쿄대 교수는 "17세기에 매우 많은 금을 생산한 걸로 알려진 중국과 동남아시아, 서아프리카에서 채굴된 정확한 금 생산량을 모른다"며 "세계 생산량이 확실하지 않은데 사도가 세계 최대라고 말할 근거는 없는 듯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사학자 니시와키 야스시 씨도 "근거를 담보하지 않은 채 세계에 어울리는 유산이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내달 하순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됩니다.
[김가현 디지털뉴스부 인턴기자 gghh7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