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은 현재 버드나무와 풀이 아름다운 생태공원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곳이 떠내려온 오염수와 고인 물의 악취에 주민들이 눈살을 찌푸리곤 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서울시는 당시에 이 한강이 흐르는 바로 옆 길목에 콘크리트를 부어서 주차장을 만들고 땅을 덮을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막아낸 사람이 한강관리사업소의 자문위원을 맡았던 정영선 조경가(83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생태공원인 샛강 생태공원의 식생을 공들여 연구한 정 조경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자연 경관도 살릴 길은 '습지 복원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한강 인근의 습지를 복원하는 프로젝트.
정 조경가는 자비를 들여 생물학자들을 초빙했고 과학적인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무원들은 홍수에 떠밀려 갈 수 있다며 한강 주변에 나무를 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콘크리트로 덮는 것이 익숙했던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 필수였습니다. 그녀는 공무원들 앞에서 생명력을 표현한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을 낭독했습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 (풀이)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의 산책로와 데크 [사진=MBN]
설득에 성공한 이때부터 한강 옆의 도로에도 나무를 심을 수가 있게 됐습니다. 여의도 빌딩 근처에는 오리가 쉬어가고 주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공간, 건강한 수풀이 우거진 공간(1997년 설계)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홍수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정 조경가는 '국내 1세대 조경가', '국내 최초 여성 국토개발기술사' 등 화려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를 소개할 또 다른 수식어를 떠올려 봅니다.
바로 '도심에도 우리 자연의 감동을 되살려내는 대가'입니다. 서울 강남의 양재천과 광화문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물길인 청계천, 선유도 공원과 경춘선 숲길 등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모두 그녀의 손길 덕에 생겨난 공간입니다.
이달 마침 정영선 조경가의 생애를 다룬 전시와 다큐가 모두 공개됩니다. 정영선 조경가를 두 차례 만나 그녀의 정연한 생각을 들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조경과 정원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정 조경가 덕분에 바로잡힐지 기대됩니다.
"조경, 단순히 나무 심는 사업 아냐…우리나라의 경관 보존해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언론공개회 자리에 참석한 조경가 정영선 [사진=MBN]
정영선 조경가는 사람들이 조경 작업을 단순히 잔디와 나무를 심는 일로 쉽게 오해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입견과 달리 조경은 경관을 보존하는 최전선에 서있는 일입니다.
정 조경가는 "우리나라는 국토 자체가 굉장히 아름다운 하나의 정원"이라며 "어떻게 하면 경관을 잘 보존하고 가꿀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경관 및 관리 계획 [사진=MBN]
정 조경가는 일찍이 제주도의 자연 경관을 지키기 위해 건축가 민현식의 주도로 디자이너 안상수 등과 함께 보호 지침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이 가이드라인은 지금까지도 제주 경관의 지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앞서 제주도가 2006년에 특별자치도로 승격되고 제주의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2007년에 지정됐죠. 정 조경가는 대동여지도 등에서부터 나타난 제주도의 특징과 식생을 연구하면서 도민의 삶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했습니다.
양재천 종합계획도 [사진=MBN]
생태 하천 복원과 도심 풍경 회복에도 집중했습니다. 정 조경가는 앞서 언급한 양재천을 1998년에 서울 한강의 지류 중 첫 생태 하천으로 복원하는 설계를 했고 2002년에는 청계천 광장과 청계천을 복원했으며, 2007년에는 광화문 광장을 설계했습니다.
정 조경가는 "우리 국토가 지금은 난개발이 되어 엉망이 되어 있는데 산천은 조금만 더 손질하고 잘 가꾸면 된다"며 "공무원들이 쓸데없이 가로수를 이것저것 심거나 시장이나 지사가 바뀌면 바꾸는 게 아니라 일관되게 가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또 경관과 관련해 지금 우리 농촌의 풍경에서 옛날의 농촌 풍경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해결해야 될 과제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연에는 감동 있어…산책하다가 훌륭한 시인이나 건축가, 철학자 나오길"
경춘선 숲길의 전경 [사진=MBN]
경춘선 숲길은 철길의 추억을 살리면서도 주민들의 삶을 향상시킨 역작입니다.
정 조경가는 "철도 옆에 살던 아파트 주민들이 소음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겠느냐"며 "제가 제일 먼저 저희 회사의 직원들에게 강조한 것은 '소음에 시달린 경춘선 인근 주민들을 도와주는 입장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를 위해 정 조경가가 떠올린 일은 화려한 색칠이나 이벤트 대신 거닐 수 있는 자연을 선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정 조경가는 "경춘선 길을 따라가면서 어린 아이들이 거닐다가 나중에 훌륭한 철학자나 시인, 건축가가 되길 소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사색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우리나라는 제일 가슴이 아픈 게 공원을 만들면 바쁘게 운동하는 것"이라며 "조용히 명상하고 반성하면서 걸을 공간이 꼭 필요하고 실현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 정원의 원리는 '경치를 빌려오는 것'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희원 모형도 [사진=MBN]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의 요소를 살리면서 생태에 맞게 최대한 자생종을 심어 본래의 경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은 정 조경가의 또 다른 큰 업적입니다.
호암미술관의 전통 정원인 희원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조경을 설계한 1997년부터 지금까지 정 조경가는 우리나라 전통 미학의 매력을 곳곳에서 살려 왔습니다.
전국을 누비고 다닌 그녀가 발견한 한국의 정원은 삼국사기 속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말처럼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건축물이었습니다.
정 조경가는 "우리나라는 낮은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물이 두루 흘러 국토 자체가 하나의 정원"이라며 "그 경관을 바라보기 위해 집의 울타리를 낮게 하고 주변의 경관을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우리나라만 가진 '차경'의 지혜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차경이라 함은 말 그대로 경치를 빌려오는 자세를 일컫습니다.
정 조경가는 "중국과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제일 좋은 경치의 한복판에서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경치를 살며시 바라볼 수 있도록 정자를 섬세하고 세련되게 지었다"며 우리 옛 선조가 갖춘 아름다움을 여럿이 알기를 소망했습니다.
"시심이 있는 경관을 만들고파"
서울 아산병원의 녹지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정 조경가의 작업은 실로 방대합니다. 인문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지난 2007년에는 서울 아산병원에 지하주차장 위에 녹지를 조성해 환자와 가족, 간병인, 의사와 간호사 등이 심신의 안정을 취하고 마음을 다잡을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커리어의 시작인 1973년에 불국사와 현충사를, 이후에도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와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국립수목원, 예술의전당과 대전 엑스포 박람회장, 코엑스, 서울식물원, 파주출판도시 등의 조경을 모두 맡아 나열하면 입이 아플 정도입니다.
'80대 현역' 정영선 조경가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옛 시에 나오는 풍경처럼 좋은 경관에 시심이 있는 정자와 같은 공간을 더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어 "난개발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도 제대로 하려고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하는 건축가 선생님들이 있다"며 "저는 저대로 한국적인 경관을 죽어라고 보존하고 싶고, 그런 분들과 함께 좋은 일을 했기에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영선 조경가의 종합과학예술 세계는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는 17일에는 사계절에 피어나는 그녀의 작품을 5년 동안 촬영하고 편집한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가 전국의 극장에서 개봉됩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