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절도 당한 '40억 김환기 그림' 원 주인이 돌려받지 못한 이유 [법원 앞 카페]
입력 2023-12-02 09:00 
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누군가 내 물건을 훔쳤는데 절도범이 훔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그럼 이 물건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게 맞을까요 사들인 사람이 갖는 게 맞을까요?

당연히 나에게 돌아오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모르고 샀으면 산 사람이 갖거나 혹은 모르고 샀더라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사소한 물건이더라도 분쟁의 가능성이 클텐데 하물며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라면 어떨까요?

최근 유명 화가의 그림이 절도 당한 뒤 제3자에게 팔렸는데 이 그림의 소유권은 원래 주인이 아닌 제3자에게 있다는 법원 판결을 소개했습니다.

관련기사 : [단독] '40억 김환기 그림' 절도당했지만 법원은 "원주인에게 돌려줄 수 없어 (지난달 30일 보도)

기사가 나간 뒤 많은 분들이 법원의 판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당연히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제3자가 절도범한테 돈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에 앞선 기사에는 담지 못한 법원의 판결 이유와 앞으로의 쟁점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그림 절도부터 법정 공방까지


고 박내회 서강대 명예교수 (사진=매일경제)

상황은 이렇습니다. 지난 2018년 12월 고 박내회 서강대 명예교수가 췌장암으로 별세했는데 이후 박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고 김환기 화백의 그림 ‘산울림 (10-V-73 #314)가 사라졌습니다. 박 교수 유족에 따르면 박 교수와 김 화백이 오래 전부터 친분을 나눈 사이였고 1980년대에 김 화백이 박 교수에게 해당 그림을 줬다고 하는데 그런 그림이 없어진 거죠. 알고 봤더니 박 교수의 제자 김 모 씨가 박 교수의 운전기사·가사도우미와 짜고 그림을 훔친 것이었습니다. 산울림 뿐만 아니라 고 천경자 화백의 유명 그림 등 평가액으로만 모두 100억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그림을 이들이 빼돌렸습니다.


절도 혐의가 적발된 이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습니다. 제자 김 씨는 징역 6년, 운전기사는 징역 2년, 가사도우미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붙잡혔지만 그림은 원래 주인이라고 볼 수 있는 박 교수의 유족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절도범들이 그림을 이미 제3자에게 판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김 씨는 지난 2019년 5월 서울 강남 소재 한 갤러리를 운영하는 조 모 씨에게 그림을 약 40억 원에 팔았습니다. 당시 거래는 미술품 전문 딜러 K 씨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조 씨는 이 그림을 다시 팔기 위해 내놨는데 이 과정에서 박 교수의 유족들이 그림의 소재를 알게 됐습니다.

그림을 팔기 전에 그림의 상태와 진품임을 확인시켜주는 ‘뷰잉이라는 걸 한다고 합니다. 2019년 조 씨 측이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뷰잉을 한다는 걸 안 유족들은 뷰잉 현장을 찾아가 그림을 확인한 뒤 조 씨 측에게 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조 씨 측은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그림이니 돌려줄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지난 2019년 6월 갤러리 대표 조 모 씨측이 뷰잉을 할 당시 박 교수 유족 측이 촬영한 그림 (사진=고 박내회 교수 유족 제공)

이후 양측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양측의 기나긴 법정 공방이 시작됐습니다. 유족 측은 먼저 그림의 소유권을 다투는 동안 그림을 처분하지 못하게 하는 유체동산 점유인도 및 처분금치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법원 집행관이 조 씨의 갤러리에 갔을 때 그림은 없었습니다. 조 씨 측은 이미 다른 곳에 그림을 판 상태라 주장했죠. 다만 실제 그림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족 측은 지난 2020년 조 씨 측을 상대로 그림을 돌려 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김지혜 부장판사)는 "그림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며 유족 측 청구를 기각하고 대신 절도범들에게 돈으로 그림 판매대금 40억 원 상당을 받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절도품인지 확인 안 한 과실 없었나

우리 민법은 이런 상황에 대한 원칙을 이렇게 정하고 있습니다.

민법 249조 선의취득

평온, 공연하게 동산을 양수한 자가 선의이며 과실없이 그 동산을 점유한 경우에는 양도인이 정당한 소유자가 아닌 때에도 즉시 그 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선의‘와 과실없이‘라는 조건입니다. 부정한 의도도, 과실도 없이 점유한 물건이라면 정당한 주인이 아니더라도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이를 법률용어로는 선의취득‘이라고 부릅니다. 즉, 조 씨가 그림을 선의취득했다면 정당한 소유자인 박 교수 유족이 아니라 조 씨에게 소유권이 인정된다는 거죠.


대법원 판례는 선의취득의 입증 책임이 선의취득을 주장하는 쪽에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즉, 조 씨가 증명해야 한다는 거죠. 조 씨는 자신이 문제 없이 그림을 산 근거로 미술품 거래 관행을 들었습니다. 미술품 전문딜러를 통해 거래를 하는 데 그림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서로의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관행을 따랐기 때문에 그림을 파는 사람이 실제 주인인지 훔친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믿을 건 딜러의 신용도뿐인데 이번 거래를 중개한 딜러 K 씨는 이전부터 조 씨와 여러 차례 거래를 했고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 씨 측은 K 씨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K 씨 측 역시 그림을 내놓은 사람이 박 교수의 제자인데다 제자 김 씨가 평소에도 박 교수를 대신해 그림 거래를 한 전력이 있는 만큼 의심할 수 없었다는 입장이었죠.

반면, 유족 측은 조 씨가 김환기 전문가‘를 자부하는 미술품 전문가인데다 K 씨도 전문딜러인 만큼 원 소유자가 박 교수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앞서 언급한 뷰잉 당시 그림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자 조 씨 측이 유족과 박 교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고도 유족 측은 주장했습니다. 반면 조 씨 측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유족 측은 ”김환기 화백 그림 도록만 봐도 버젓이 소유자가 박내회 교수라고 나오는데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도 주장했지만 조 씨 측은 자신들이 본 도록에는 개인소장‘이라고만 적혀 있었다고 맞섰죠.

서울중앙지법 (사진=연합뉴스)

결국 재판부는 미술품 거래관행과 조 씨 측 주장을 고려할 때 과실이 있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판단해 선의취득‘을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K 씨가 미술품 전문딜러이고 조 씨 역시 갤러리를 운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림 매수 당시 과실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이 들기는 한다고 말했지만 증거가 없다고 봤습니다.

유족 측은 과실 여부를 경찰이 수사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미 재판에 3년이 넘게 걸린 만큼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막상 수사를 맡은 경찰 역시 검찰의 두 차례 보완수사 요구에도 지난달 6일 혐의가 없다는 같은 결론을 내 검찰에 통보했습니다.

재판부와 경찰의 결론은 모두 조 씨가 훔친 그림인 줄 알고 샀다고 볼 증거가 없으므로 선의취득을 인정해 소유권을 인정한다‘였습니다.

훔친 그림인데 장물은 아니다?

앞서 말씀드린 민법 249조 다음 조항에는 이런 조항도 있습니다.

민법 제250조 도품, 유실물에 대한 특례

동산이 도품이나 유실물인 때에는 피해자 또는 유실자는 도난 또는 유실한 날로부터 2년 내에 그 물건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도품이나 유실물이 금전인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훔친 물건을 모르고 샀다고 무조건 소유권을 인정해주면 원 소유주 입장에서는 억울한 경우가 많을 겁니다. 훔친 범인들은 물건을 갖고 있기보다 바로 처분하려는 경우가 많을 테니 이런 부분을 방지하기 위해 민법은 2년 내에 반환을 청구하면 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거죠. 유족 측은 이 조항에 따라 그림이 장물이므로 선의취득이라 하더라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근거는 대법원 판례였습니다. 대법원은 2년 내에 돌려 달라고 할 수 있는 '장물'의 조건을 권리자 의사와 무관하게 점유를 상실한 경우‘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원래 주인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훔친 물건을 내다 판 경우를 장물이라고 보고 이미 제3자에게 팔았더라도 돌려 달라 할 수 있다는 거죠. 반면, 원래 주인의 대리인 위치에서 물건을 맡고 있던 사람이 물건을 빼돌린 경우는 다르다고 봤습니다. 이 경우는 절도가 아닌 횡령‘이 되는 건데 횡령으로 내다 판 물건은 위 민법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대법원 입장인 겁니다.

재판부는 이런 법리를 고려할 때 이번 그림 절도는 형법 상으로 절도죄지만 횡령에 가깝다고 판단했습니다. 제자 김 씨가 평소 박 교수를 대리해 거래를 도와왔고 딜러와 조 씨도 이 때문에 의심을 하지 않은 걸로 보이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제자 김 씨와 운전기사의 역할, 가사도우미가 실행행위까지 함께한 점을 종합해 보면 그림에 관해 진정한 권리자의 의사가 완전히 배제된 채 무관하게 점유를 상실한 경우라고 볼 수 없어 민법 250조의 도품·유실품 특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봄이 타당하고, 결국 그림이 절취된 사실, 무권리자의 처분임을 모르는 제3자인 조 씨측에 양도된 이상 조 씨측이 그림의 소유권을 취득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림의 장물성도 상실되었다.

- 1심 선고


”판사마다 판단 달라질 수 있는 쟁점

결국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원래 주인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는 훔친 물건인 줄 모르고 산 선의취득‘, 절도가 아니라 횡령에 가까운 만큼 2년 안에 반환을 요구할 수 있는 특칙이 적용되지 않음‘ 이렇게 두 가집니다.

유족 측이 항소한 만큼 2심 재판에서 다시 공방이 벌어질 전망인데 2심 재판에서도 이 두 가지가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미술품 분야 전문 변호사인 박주희 변호사는 과실이 있었는지 쟁점에 대해 "어느 도록에는 개인소장이라고만 표시돼있고 어느 도록에는 원 주인의 이름이 표시가 되기도 했는데 이런 부분을 왜 확인하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2심 재판부가 지적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민법 250조 특칙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도품이라면 도둑 맞은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냐, 형사재판에서도 죄명이 절도죄인데 같은 게 아니냐고 유족 측이 2심에서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에 대해 재판부마다 1심과 같은 판단을 내릴 수도,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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