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폐허 속 피어난 희망…안젤름 키퍼 전시회 ‘가을Herbst’
입력 2023-10-20 10:30 
안젤름 키퍼 ‘Herbst, Für R. M. Rilke, 2022’ ⓒAnselm Kiefer, Photo George Ponce(사진 HEREDIUM제공)
대전에서 만난 독일의 거장
헤레디움, 100년의 시간과 만난 전시

대전 초기 도시 형성의 중심지였던 인동. 1922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조선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경제 수탈 기관을 세웠던 이곳에선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구석구석에서 옛 시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폐허의 공간에서 복합예술공간으로 변한 ‘헤레디움 역시 마찬가지다. 가을의 문턱에 접어드는 시점. 20세기 후반의 신표현주의 미술 운동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 작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과 헤레디움이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미술의 거장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의 ‘가을Herbst전이 한국에서 열리고 있다. 2024년 1월31일까지 대전 동구 인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HEREDIUM에서 펼쳐질 이번 전시는, 세계 2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2023 프리즈(Frieze Seoul)와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와의 협업으로 진행되며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작품을 포함해서 총 17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안젤름 키퍼는 여러 시인의 작품을 모티프로 하여 자신의 작품에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이미지로 사고하고, 그 작업을 시가 돕는다고 말할 정도로 시를 사랑하는 예술가이다. 그의 최신작은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 M. Rilke, 1875~1926)의 시를 모티프로 한다. 키퍼는 삶이 변화하는 모습을 노래하는 릴케의 시에서 고독한 이면에 존재하는 희망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포착해냈다. 삶의 아픔 앞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작가의 철학은, 아픈 역사가 담긴 구 동양 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 시민을 위한 복합문화예술공간 헤레디움으로 재탄생된 맥락과 맞닿아 있었다.
헤레디움, 100년의 시간과 만난 전시
헤레디움 외관(사진 HEREDIUM)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인 ‘헤레디움은 라틴어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으로, 1922년에 만들어진 구 동양 척식주식회사를 복원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과거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며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세워진 동양 척식주식회사는, 서울에 본점을 두고 전국 주요 도시에 각 지점을 세웠다. 해방 이후엔 9개의 지점 중 부산과 목포 그리고 현 대전 동구 인동에 지사 건물만이 남았다. 부산과 목포의 건물은 현재 근대역사관으로 바뀌었지만, 동양 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신한공사로 변경되었다가, 대전 체신청(우체국 역할)으로 사용됐다. 1955년경 대전 전신전화국 신설로 사용된 후엔 민간에게 매각돼 상업시설로 쓰였고, 쓰임이 줄어들며 폐허가 될 운명에서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1922년 일본 건축가 오쿠라구미 설계 당시의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 그리고 경사지붕으로 구성된 2층 규모의 절충주의 서양식 건축양식이 특징이었다. 건물이 지어진 지 100년이 흐른 뒤, 재단법인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이 2년여에 걸쳐 다양한 고증자료와 분석을 통한 복원작업·리모델링으로 현재는 옛 모습을 간직한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재탄생시켰다. 지난 9월8일 공식 개관한 이곳은, 근대 건축물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고, 동시대 문화예술을 담아 미래 가치를 후대에 전한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추후 이곳에선 현대미술 전시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헤레디움 정문의 파사드(사진 이승연)
지금도 전시장 곳곳에서 구 동양 척식주식회사의 흔적을 마주하는 건 어렵지 않다. 헤레디움 정문의 파사드(실제 전시장 입구는 옆 문을 이용해야 한다) 대리석에는 ‘1922와 ‘2022라는 숫자가 각인돼 있다. 그리고 건물 1층에 있는 금고문과, 2층에 100년 된 콘크리트 천장 또한 마찬가지. 천장은 복원 당시 해당 부분을 관람객에게 공개하기 위해 노출 천장으로 리모델링해 선보였다. 현재 일반 관람객에게는 공개하지 않지만, 2층과 연결된 외부 테라스 공간에도 일부 목재 창문과, 외벽에 쓰인 일부 자재는 동양 척식주식회사 당시의 타일(벽돌)을 사용했다. 유독 색이 진한 옛 타일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수탈의 장소를 소통의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새로운 100년을 열고자 하는 헤레디움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폐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안젤름 키퍼의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볼 부분이다.
헤레디움 내부 ‘가을Herbst 전시(사진 이승연)
풍요와 상실의 가을과 닮은 예술
안젤름 키퍼는 20세기 후반의 신표현주의 미술 운동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 독일의 화가·조각가이자, 역사·문화·신화적 소재에서 촉발한 다층적인 주제를 예술로 표현하는 현대미술 ‘최고의 거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1992년부터 프랑스 파리와 바르작을 오가며 활동 중으로, 지난 2007년엔 생존 작가 중 두 번째로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을 영구 설치, 2022년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베네치아 건국 1,600주년 기념 행사로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 내 단독 전시(‘Questi scritti, quando verranno bruciati, daranno finalmente un po di luce(Andrea Emo)를 진행하며, 궁전 내부의 벽을 가득 덮은 거대한 스케일의 캔버스 작품으로 화제가 되었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photo Atelier Anselm Kiefer(사진 HEREDIUM제공)
키퍼는 그리스와 게르만 신화, 연금술, 기독교 상징주의에 대한 레퍼런스뿐 아니라 수많은 시인의 글을 통해 영감을 받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다층적 주제만큼이나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혼합하고 축적하여 다시 제작함으로써 형식적 발전을 꾸준히 이루어왔다는 것. 회화의 환영(illusion)과 재료의 성질을 공존시키는 방식으로, 캔버스 위 나무, 말린 식물, 모래, 진흙, 납, 밧줄, 전깃줄 같은 비(非)회화적인 재료를 사용해 실재적인 질감을 재현하며 입체감을 더하기도 한다.
‘가을Herbst전은 그러한 키퍼의 작품 속 특징들을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키퍼는 작가가 되지 않았으면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많은 시를 외우고 문학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선 자필로 새긴 시 구절이나 인용문, 이름 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엔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만들어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중에서 ‘가을날Herbsttag(1902), ‘가을Herbst(1906), 그리고 ‘가을의 마지막Ende des Herbstes(1920)이라는 세 편의 시를 중심으로 선보인다. 전시장 내 18개의 작품 속 가을은 황량하면서도 서정적인, 그리고 ‘부패에서 다시금 재탄생이라는 순환적 의미 등을 담고 있다.
안젤름 키퍼가 표현한 가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0여 년 전, 키퍼가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방문했을 때가 가을이었는데, 당시 나뭇잎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고 황홀해 작가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고, 이후 작업을 진행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대표작 ‘가을(Herbst, Für R. M. Rilke), 2022은 낙엽이 비추는 빛과, 그 빛이 만들어내는 색감에 영감을 받았다. 금박으로 표현한 낙엽의 빛은 쇠퇴가 아닌 재탄생을 떠올리게 한다. 릴케의 시와, 작품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가는 삶의 순환에 대해 거듭 이야기한다.
안젤름 키퍼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2022 ⓒAnselm Kiefer, Photo George Poncet(사진 HEREDIUM 제공)
전시장 2층에선 이번 전시의 가장 상징적인 작품인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2022를 만나볼 수 있다. 홍토와 짚으로 만든 쌓인 벽돌 구조. 언뜻 보면 폐허 같기도, 또는 집을 짓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18개의 벽돌을 통해 턱없이 부족한 쉼터(Shelter)에 대한 가슴 아픈 상기이자, 인간이 만든 것(man-made)을 자연계의 순환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철학적이되 난해하지 않은, 감성적인 작품들을 선보임으로써 작가는 자신은 물론 관람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1945년생인 안젤름 키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났다. 작가에게 있어 폐허는 유년시절 놀이 공간과 같았다. 혼란스러웠던 시대 속에서 성장해온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 논쟁거리, 윤리적 문제, 민족적인 정체성 등을 표현한다. 대전 헤레디움과 독일 거장의 만남. 폐허가 될 뻔하다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로운 시작을 연 이곳에서, 삶의 순환과 재탄생을 이야기하는 키퍼의 작품이 올가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 포스터(사진 HEREDIUM)
Info 안젤름 키퍼 ‘가을Herbst
일정 2023년 9월8일~2024년 1월31일
장소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 74-1
시간 수~일요일 11:00~19:00(입장 마감 18:30) *매주 월, 화요일 휴관
[글 시티라이프부 이승연 기자(lee.seungyeon@mk.co.kr)]
[사진 헤레디움, 이승연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01호(23.10.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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