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Travel]마음 치유의 풍경...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을 걷다
입력 2023-09-21 00:14 
금강소나무 군락지
서울역에 내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내내 꼼짝없이 시선을 붙잡았던 건 마치 눈앞에 서있는 듯 생생했던 소나무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기억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봐야지. 울진 금강소나무 숲은 그렇게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산림유전자보호구역으로 누구나 또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금강소나무 숲이 울진에 있다. 줄달음치듯 정신없이 지내왔지만 소득은 별것 없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울진의 소나무 숲을 떠올린다. 그리고 떠나기로 했다.
천천히 그리고 가볍게, 소나무 숲속으로
금강소나무 숲을 온전히 느껴보려면 1구간 보부상길부터 5구간 보부천길까지 모두 걸어봐야 하지만 울진 금강소나무 숲을 처음 찾는다면 약 5.3km의 거리, 걷는 데 3시간 정도 걸리는 ‘가족탐방로를 걸어보는 게 좋다.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금강소나무 군락지와, 조선시대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십이령옛길이 어우러진 길이다. 또한 산림청이 만든 1호 국가숲길이기도 하다. 지난 2010년에 1구간을 개통한 이후 모두 7개의 구간을 조성, 현재는 구간 정비 등으로 일부 구간만 운영하고 있다. 금강소나무 숲길은 모든 구간에 예약탐방 가이드제를 시행한다. 탐방은 무료로 진행하지만 반드시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구간마다 하루 탐방 인원을 제한하고 숲 해설사가 안내한다.
산림생태관리센터도 들러봄직하다.
오전 10시, 가족탐방로의 시작 지점 소광리 산림생태관리센터 앞이 부산하다. 탐방객들은 들뜬 표정으로 탐방을 준비한다. 탐방 예약을 한 사람들을 체크하고, 탐방 후 먹을 점심식사 신청도 받는다. ‘숲밥이라 부르는 점심식사는 가족탐방로만의 특별한 재미다. 마을 주민들이 정성껏 지어오는 숲밥이 맛있어 가족탐방로를 다시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 점심식사까지 예약을 마치면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된다. 숲 해설사와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함께 하며 탐방 준비를 한다.
숲 해설사와 함께 하는 소나무 군락지 트레킹
서어나무와 쪽동백나무 등 활엽수 숲길 양 옆으로 드문드문 금강소나무가 눈에 띄지만 본격적인 군락지는 아니다. 하지만 활엽수 사이사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의 자태는 늘씬하고도 매끈하다. 숲길을 걷다 계곡을 만나고 징검다리를 건너자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지점에 이른다. 심어진 시간에 따라 키가 다른 소나무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햇빛을 받아 유난히 푸른 소나무 군락을 바라보는 순간 불과 몇 시간 전 머물고 있었던 도심의 풍경이 지워진다. 숲의 치유를 눈으로 체험하는 순간이다.
일반 소나무보다 3배 이상 나이테가 촘촘한 금강소나무와 안도현 시인 시비
‘울진금강송을 노래함이란 안도현 시인의 시가 있다. 이곳에 서니 ‘하늘지붕의 기둥이 되는 금강송의 나라, ‘묻지 말고 소광리로 가라고 하는 시인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안도현 시비석을 지나자 우람하면서도 멋스러운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오백년소나무다. 수령 540년. 신송(神松)으로 일컬어지는 소나무다. 탐방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가족탐방로의 첫 번째 포토 존답게 분주하다.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이지만, 신의 경지에 이른 나무와의 ‘케미가 생경한 듯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1.금강소나무전시실에서의 해설 2. 우측 탐방로
오백년소나무 맞은편에 금강소나무 전시실이 있다. 안에는 일반 소나무와 금강소나무를 비교할 수 있도록 아름드리 소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판재와 단면목 등을 비치해 놓았다. 숲 해설사의 설명에 탐방객들 모두 흥미롭게 빠져든다. 금강소나무는 척박하고 추운 지역에서 더디게 자라 일반 소나무보다 나이테가 몇 배나 촘촘하다. 따라서 뒤틀림이 적고 강도가 높아 궁궐이나 사찰 등의 건축재로 사용되었다. 금강산에서 시작해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따라 자라는 금강소나무는 이곳 소광리에서 최대 군락을 이룬다.
오백년소나무
소광리의 금강소나무는 줄기가 곧고 알찬 명품으로 ‘황장목으로 불린다. 속이 누런빛을 띠는 질 좋은 소나무란 의미다. 황장목이란 궁궐을 지을 때나 임금의 관을 짤 때 쓰이는 나무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황장목 산지에 금표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금강소나무는 춘양목으로도 불린다.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 초까지 집을 짓거나 땔감용으로 소나무가 많이 벌목되었는데 이것을 경북 봉화의 춘양역에 모아 보내면서 춘양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강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고 길게 뻗은 자태다
오랜 시간이 빚어낸 소나무의 걸작들
오백년소나무 근처에는 의미 있는 상징물이 조성돼 있다. 2005년 11월 11일, 산림청과 문화재청은 이곳 금강소나무 숲을 잘 가꾸고 보전하여 후손들이 문화재용으로 값지게 사용하게 할 것을 협약했다. 그리고 금강소나무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150년 후에 볼 수 있도록 타임캡슐을 묻어놓았다. 지난 2011년 11월11일에는 오백년소나무 근처에 금강소나무 1,111본을 식재했다. 역시 150년 후 미래 세대를 위한 상징적인 기념식수였다. 먼 훗날, 크고 웅장하게 자라 기품 있는 노송으로 우뚝 서있을 금강소나무를 떠올려본다.
길을 걷는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라 탐방객들이 질문도 끊이질 않는다. 숲길 우측으로 기이한 모양의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연리지와는 반대로 한 나무가 두 가지로 갈라져 자라는 분리목이다. 마치 다이빙 선수의 모습을 닮지 않았냐고 운을 뗀 해설사는 다이빙은 잘 했는데 다리가 벌어져 감점을 받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일행들 사이에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좌로부터)미인송, 마치 다이빙하는 수영선수를 닮은 분리목, 바위에 뿌리를 내린 서어나무, 졸참나무와 소나무가 서로 기대고 있는 공생목
조금 더 올라가면 못난이소나무를 만난다. 수령 530년이 넘은 신송이다. 멋들어지게 생긴 나무에 왜 못난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관상용으로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보다 황장목 같이 쓰임에 더 큰 의미를 두다 보니 못나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모든 나무가 다 황장목이 될 수 없으니 오랜 세월을 버텨온 끝에 오히려 수려한 외모를 지니게 된 못난이소나무에 경의를 표한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서어나무도 있다.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 사이 바위 속에 뿌리를 내린 듯한 모양이다. 오랜 세월 동안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나무의 힘이 바위를 갈라놓은 것이다. 특이한 모양을 한 나무도 있다. 공생목이다. 커다란 소나무를 졸참나무가 지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힘겹고 애처로워 보인다.
매력적인 자태의 못난이소나무
졸참나무가 소나무에게 시집을 왔는데 남편을 잘못 만나 평생을 고생하고 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 그럴 듯해 보인다. 혹시 이렇게 살고 계신 분 있으세요?” 해설사의 촌철살인이 이어진다. 언뜻 보기엔 졸참나무가 소나무를 받쳐주고 있는 듯하지만 소나무 또한 아낌없이 양분을 나눠주며 살아가고 있어 공생목이라 이름을 붙였단다.
탐방로의 끝이 보일 즈음 유난히 크고 긴, 하늘로 곧게 뻗어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미인송이다. 수령 350년이 넘은 이 나무는 높이가 35m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바닥에서 으뜸가지까지의 높이가 높은 금강소나무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가지가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다. 예쁘기 그지없다. 오죽하면 미인송이라 이름을 붙였겠는가. 미인송이니까 나지!”, 나랑 제일 잘 어울리지 않아?” 아름드리나무를 부여안고 사진찍기에 몰두하는 일행들 사이로 웃음꽃이 떠나질 않는다.
대왕소나무
문득 일찍이 이 길을 걸었던 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의 말이 떠오른다. 삶에 지친 분들이 이 길을 걷게 되면 위안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의 수많은 길을 걸어 보았지만 이 길만큼 나를 감동시킨 길이 없다.” 크고 웅장한 소나무는 위압감 대신 포근함으로 다가선다.
금강소나무의 선물 금강송 송이
금강송 밑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은 울진의 자랑이다. 울진 금강송 송이는 다른 지역 송이에 비해 식감이 뛰어나고 향기가 풍부하다. 쫄깃한 식감은 물론 이어지는 향긋한 솔잎향이 일품이다. 송이는 오래된 소나무 뿌리 끝부분에 붙어 기생한다. 기생목인 금강소나무에 화강암과 편마암이 풍화돼 생긴 마사토와 동해의 해풍을 맞고 자라 표피가 두껍고 단단해 맛이 잘 변하지 않는다. 향 또한 오래 간다. 같은 송이버섯이지만 울진 송이가 명품으로 꼽히는 이유다. 울진 사람들은 이를 생으로 길게 찢어서 먹는다.
『동의보감』에는 ‘자연산 송이는 소나무의 정기가 배어 있고 독이 없으며 향기가 좋아 버섯 중에 으뜸이라 적혀 있다. 보양식으로 제격이고 항암효과도 뛰어나다. 또 항균과 해독에도 좋아 한방에서 귀한 약재로 여긴다. 자연산 송이는 송이는 9월에서 10월까지 불과 40여 일 동안만 채취할 수 있는 귀한 버섯으로 kg당 수매가격이 100만 원을 호가한다.
먹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숲밥의 행복
미인송을 지나면 탐방로의 끝이자 원점회귀 지점이다. 잠시 쉬어간다. 물도 마시고, 챙겨온 과일이며 간식거리를 서로 나눈다. 탐방로의 절반 정도를 체험한 사람들의 반응도 만족이다. 상상했던 소나무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멋있었다는 얘기, 해설사와의 동행이 재밌고 편안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전망대에 서면 건너편 산을 가득 메운 소나무 숲이 싱그럽고 바위 능선 부근의 산양 서식지도 보인다. 다른 숲에 비해 피톤치드가 다섯 배나 된다는 설명에 느릿느릿 여유를 두게 된다.

생태탐방로 끝자락에서 계곡을 건너면 탐방을 시작할 때 거쳐 갔던 넓은 공터가 나오고 그곳에 단아한 모습의 한옥 정자 송낙정이 있다. 기대하던 점심식사인 ‘숲밥을 먹을 장소다. 일행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주민들이 밥과 반찬을 펼쳐 놓는다. 보기만 해도 맛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정성이 듬뿍 들어간 밥상이다. 마을 주민들이 기르고 채취한 재료로 만든 식단이다. 3시간 정도의 숲속 산책 끝에 먹는 점심은 꿀맛이다.
숲의 위로와 치유를 경험했던 소중한 3시간이다.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와 나머지 여섯 개의 구간도 차근차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옛날 이곳을 넘나들었던 보부상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또 다른 감동과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이상호(여행작가) 사진 제공 금강소나무 숲길 안내센터, 울진군청, 이상호]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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