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강간죄 명칭 '부동의 성교죄'로 변경
"강제로 동의 시킬 수도" 지적에 출시일 연기
'동의 없는 성관계는 범죄' 인식 세계적 추세
우리나라 정부는 '신중한 반대 입장' 유지
'비동의 간음죄' 도입 두고 찬반 입장 팽팽
"강제로 동의 시킬 수도" 지적에 출시일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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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의 성교죄'를 시행 중인 일본에서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됐습니다.
앱 이름은 '키로쿠'. 스마트폰에 앱을 다운로드한 뒤 동의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동의'를 누르면 QR코드가 형성됩니다.
이 QR코드는 상대방과 서로 공유할 수 있으며 앱에 자동으로 저장돼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개발사는 "성적 동의서를 작성하기 위해 종이에 이름을 적고 날인해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다"며 "전문 변호사의 감수까지 마쳤기 때문에 법적 다툼에서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고 홍보했습니다.
그러나, 출시를 앞두고 오히려 앱을 악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강제로 성행위에 동의했다는 기록을 남겨 범죄자가 처벌을 피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려가 쏟아지자 개발사는 결국 앱 출시일을 이번 달 25일에서 올해 안으로 연기했습니다.
개발사는 "악용 가능성을 방지할 수 있도록 보안 기능을 강화하고, 강제적인 동의가 기록됐을 때 구제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는 등 기능을 조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본은 지난달 13일부터 '부동의 성교하면 처벌하는 법'을 시행 중입니다.
이전에는 '강제 성교죄'와 '준강제 성교죄'로 나누어져 있던 성범죄 규정을 '부동의 성교제' 하나로 통합하고, 총 8종류의 가해자 행위 및 상황 등을 명시했습니다.
'폭행·협박' 뿐만 아니라 '알코올·약물 섭취', '공포·놀라움', '학대', '지위 이용' 등 8개 항목이 법에 열거됐습니다. 이는 성범죄를 더욱 엄격하고 정확하게 처벌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일본에서 이 같은 법률 개정이 이뤄진 것은 지난 2019년 연달아 내려진 성폭행 무죄 판결이 계기가 됐습니다.
2019년 3월 12일 후쿠오카지방재판소 구루메(久留米)지부는 40대 남성이 게임 벌칙으로 마신 술에 취한 20대 여성에게 접근해 성관계를 한 사건에 대해 "여성이 성관계를 허용했다고 잘못 믿었다"는 남성 측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같은 달 19일 시즈오카지방재판소 하마마쓰(浜松)지부는 "피해 여성이 공포에 질려 저항이 불가능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저항하고 있는 사실이 가해 남성에 전해지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또, '친부가 딸을 성폭행'한 사건을 맡은 나고야지방재판소 오카자키(岡崎岐)지부도 "19살인 피해자가 성교에 동의하지 않았고, 14살부터 성적 학대를 받아 저항하기 어려운 심리 상태였음"을 인정하면서도 "현저하게 저항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며 친부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성범죄 피의자에 대해 무죄 판결이 잇달아 내려지자 일본 내 여성계와 시민단체는 도심에서 항의 집회를 열며 법 개정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성폭력피해자단체 '스프링'은 "피해 실태를 반영하지 않고 시민 감각과 어긋난다"면서 형법 개정을 요구하는 요망서를 법무성 등에 제출했고, 이와 관련한 논의가 2021년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올해 강간죄의 명칭을 '부동의 성교죄'로 바꾸고 성범죄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통과됐습니다.
이제 일본에서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했을 경우, 일본 형법 제177조에 따라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해집니다.
'동의 없는 성행위=범죄' 세계적 추세…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동의 없이 이뤄진 성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인식이 점차 높아지며 이를 법제화하는 각국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작년 8월 스페인이 '합의 없는 성관계는 모두 강간'이라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유럽연합(EU)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현재 유럽 내에서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나라는 독일과 벨기에, 덴마크 등 13개국입니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여러 국가에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성적 침해를 강간죄 등으로 규정해 처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비동의 간음죄' 형법 개정안 10개가 발의된 것에 이어 현재 21대 국회에서는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는 3개의 형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입니다.
다만, 아직 구체적인 도입 계획은 논의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회 각층의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며 반대 취지의 신중검토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정부는 지난 6월 유엔 산하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비동의 강간죄' 관련 질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답변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지난 5년간 우리 정부에 대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할 것을 5차례 권고한 바 있습니다.
"피고인이 무죄 입증해야 하는 상황 발생할 수도"
정부가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신중한 이유는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2월 관련 질문을 받고 "범죄를 의심받는 사람이 상대방 동의가 있었다는 걸 법정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억울하게 처벌받게 되는 구도가 된다. 죄를 안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반대로 입증하는 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다만, '피고인에게 증명 책임이 전가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의견이 같은 법조계 안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국회도서관에서 개최된 '형법 297조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서울중앙지법 소속 현직 부장판사는 "피고인에게 증명 책임이 전가된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입증 책임은 당연히 검사에게 있다"며 "현재도 검사는 강간 피의자를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하기 위해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강간죄로 기소된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대부분의 사건에서 '동의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데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며 "기소된 사건 대부분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유죄 여부는, 검사가 피고인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외에도 피고인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제출하는 증거자료와 증인신문 내용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해당 판사는 "입증 책임 개념은 피고인에게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증명 책임은 피고인과 피해자 양 당사자 모두에게 부과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형사재판은 원래 '고의'라는 개념으로 많은 재판하는 곳"
이 판사는 또 다른 반대 논리인 "동의 여부 확증이 어렵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습니다.
그는 '피해자의 내심만으로 범죄 성립이 좌우되는 건 부당하다'는 의견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원래 형사재판이란, 피고인의 내심의 의사가 무엇이었는가를 '고의'라는 개념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이 재판하는 곳"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심의 영역을 재판하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지적은 재판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고 일축했습니다.
토론회에 참석한 현직 변호사도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형사처벌이 좌우되는 경우는 이미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의 의사를 고려하는 것은 형법에서 어느 정도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다는 겁니다.
해당 변호사는 "집주인이 동의하면 집들이, 집주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주거침입이 된다. 상호 동의 하에 일정한 규칙에 따라 서로를 때리면 스포츠 경기, 그런 동의가 없으면 그냥 폭행이 된다"며 "오로지 피해자의 의사만으로 형사처벌이 좌우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개정하고자 하는 건, 수많은 상황에 대해 법이 일일이 개입하여 피해자의 의사를 '동의·비동의'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영역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필요한 범위에서만 '동의'라는 개념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되면 억울한 사람 많아질 것"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되면,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라는 주장도 대표적인 반대 논리 중 하나입니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되면, 합의한 관계였음에도 이후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도 있다"며 "피해자의 주관적 의사만을 범죄 성립의 구성 요건으로 할 경우 이를 입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성폭력 무고'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막연한 우려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10월 발표한 '디지털 성폭력 범죄, 성폭력 무고죄를 중심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2017∼2018년 무고 사건 전체 피의자는 1만 3,534명입니다.
이들 중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제3자가 무고 피의자가 된 사건과 중복된 사건은 제외하고' 형사 입건된 피의자 수는 1,190명입니다.
이 가운데 실제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341명에 그쳤습니다. 같은 기간 검찰이 수사한 성폭력 범죄 피의자는 8만 677명입니다.
당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진은 "성폭력 사건 중 무고 사건 비중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두들겨 맞아야 '강간' 성립되는 낡은 형법 지겨워"
현재 대한민국 현행법상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4월 신발을 신지 못할 정도로 의식을 잃은 20대 여성을 모텔로 데려가 성관계를 한 남성이 강간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피해자가 '싫다'는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검찰은 "피해자가 사건 직후 바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며 강간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일부 적용된 혐의에 대해서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당시 피해자는 "더 거세게 저항해서 한 대라도 맞을 걸, 그랬으면 혹시 재판 결과가 달라졌을까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는 심정을 밝혔습니다.
이와 관련해 비동의 강간죄를 대표 발의한 정의당 류호정 의원은 "흠씬 두들겨 맞아야만 강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낡은 형법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분노했습니다.
류 의원은 "대한민국에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막히고 있는 이유는 무고한 남성의 인생을 망치는 '꽃뱀'이 늘어난다는 판타지 때문"이라며 "그 판타지를 믿는 일부 남성들의 키보드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실제 존재하기 때문에 막히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맞고 안 맞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동의하지 않았을 때 관계를 강제당한, 성적자기결정권 침해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최유나 디지털뉴스 기자 chldbskcjstk@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