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일본도 우리 법원도 도입한 '비동의간음죄'…남은 건 입법? [법원 앞 카페]
입력 2023-07-28 18:29  | 수정 2023-07-29 10:36
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A 씨는 지난 2017년 서울의 한 클럽에서 한 남성 B 씨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뒤 술을 함께 마셨습니다. A 씨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B 씨 일행은 A 씨를 차에 태워 경기도의 한 모텔로 데려갔습니다. B 씨는 술에 취해 의식이 없던 A 씨를 상대로 성관계를 하려다가 멈췄고, 다음날 A 씨가 깨어난 뒤 성관계를 했습니다.

A 씨는 "술에 취한 뒤 깨어날 때까지 기억이 없다", "깨어난 뒤 B 씨가 내 옷을 벗기려 했고 싫다고 했지만, B 씨의 강요로 관계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B 씨는 "술을 마실 때 '오늘 같이 잘까'라고 물어보자 A 씨가 '응'이라고 했다", "A 씨가 깨어난 뒤 '이제 해도 되냐'고 묻자 A 씨가 '할려면 콘돔을 끼고 와라'라고 말했다"며 동의한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A 씨는 B 씨를 강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처벌되지 않는 '비동의간음'

결과는 불기소입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강간죄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형법 297조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강간이 인정되려면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검찰은 A 씨가 B 씨보다 먼저 깨어났음에도 구조요청 등을 하지 않은점, "할려면 콘돔을 쓰라"고 말한 점, 성관계를 한 뒤 두 사람이 편의점에서 초코우유와 젤리를 산 뒤 헤어진 점, 이틀이나 지나 신고를 한 점 등을 비춰볼 때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대법원 (사진=연합뉴스)

결국 A 씨가 깨어나지 않은 사이 B 씨가 성관계를 시도하려다 멈춘 행위만 '준강간 미수'혐의로 기소됐지만 B 씨는 올해 4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범행을 하려다 실패한 게 아니라 스스로 멈췄기 때문에 미수범이 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대법원 선고가 난 위 A 씨는 아래와 같은 입장을 밝혔습니다.

강간은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처럼 험악하고 폭력적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나는 얻어맞거나 목숨을 위협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는 극심한 무력감과 함께 공포 속에 있었다. 최선을 다한 저항과 거듭된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는 상대방의 행위는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게 나를 제압했다.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할 것에 대해 절대로 동의한 바 없다. 내가 당한 일은 명백한 강간이었지만, 법원은 그 행위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 A 씨 입장문

A 씨 사례는 비동의간음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이유로 내세워졌습니다. 현행법이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A 씨의 피해에 '비동의간음'이라는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는 것이죠. 폭력과 협박이 없었더라도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법개정 부작용보다 이익이 크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지난 2020년 8월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형법 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5일 국회에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존 형법에 있는 강간죄 대신 '비동의간음죄'를 도입하자는 취지입니다.

발제자로 나선 나무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장은 A 씨처럼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당했음에도 강간이 되지 않아 처벌되지 않은 사례들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지난해 1년 동안 강간 사례 4,765건을 분석한 결과 62.5%는 폭행과 협박이 없이 회유나 강요 속임 등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권 대표는 이 중 많은 사례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비동의간음죄가 도입될 경우 반작용 우려로 거론되는 '무고' 가능성 역시 언급됐습니다. 동의 여부를 입증하기 어려운 만큼 동의한 성관계를 했음에도 이후 한 쪽에서 동의하지 않았었다며 '무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앞서 지난 2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류호정 정의당 의원의 대정부 질문에서 "범죄를 의심받는 사람이 상대방의 동의가 있었다는 걸 법정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죄를 안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처벌받게 되는 구도가 된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 바 있죠. 이 때문에 올해 초 여성가족부가 비동의간음죄를 도입하려 했다가 법무부의 반대로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2월 8일 국회에서 열린 제403회 국회(임시회) 제4차 본회의 교육·사회·문화에 관한 질문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소속 이경환 변호사는 "부작용이 우려되는 건 맞지만 입법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지난 2018년 통계에 따르면 성범죄 무고 사건 8만 건 중 실제 기소되는 경우가 0.5%에 그쳤는데 이런 점을 고려하면 무고에 대한 공포가 과다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재판에는 이미 도입됐다?

이번 토론에서 눈에 띄는 건 이미 법원에서는 비동의간음죄의 취지를 고려한 재판이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토론자로 참석한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무죄를 다투는 성범죄 재판에서 대부분 쟁점은 피해자 동의 여부에 수렴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근래 성범죄 재판에서는 폭행·협박이라는 용어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고 유형력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고 느낀다"고도 말했습니다.

강간죄 혐의로 기소가 된 사건에서 재판부가 강간죄의 구성 요건인 폭행·협박이 있었는지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폭행·협박을 포함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강제 성관계로 나아간 영향력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 유형력에는 심리적 압박과 같은 것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죠.

김 부장판사는 "근래 성범죄 판단 공식은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가 있었다' - '그럼 왜 동의하지 않는 성관계가 있었나' -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는 항거 불능 상태였기 때문이다'가 현재 재판의 흐름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강간죄 사건에서 동의 여부를 먼저 살펴본 뒤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성관계가 이뤄질 유형력이 있었다면 강간죄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나온다는 겁니다.

실제 이런 이유로 강간 혐의가 무죄에서 유죄로 바뀐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난 2020년 한 여성은 연인관계였던 남성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강간을 당했다며 남성을 고소했습니다. 1심 법원은 유죄라고 봤지만 2심 법원은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은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내지 협박행위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나 묘사가 결여돼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는데 폭행이나 협박을 기준으로 강간 여부를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대법원은 2심을 뒤집고 다시 유죄로 판단하면서 "피해자는 범행 당시 명시적으로 성관계를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피고인도 이 사건 범행 당시의 성관계가 피해자 의사에 반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동의 여부를 판단한 겁니다.

이런 분위기를 두고 이 변호사는 "비동의간음죄가 도입된다고 해서 법원 선고나 판단의 매커니즘이 엄청나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수적인 일본도 도입


재판에서 먼저 비동의간음죄의 취지가 반영되고 있다면 그것이 트렌드인 만큼 오히려 입법이 따라가줘야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해외 사례를 봐도 비동의간음죄가 이미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라고 여기는 일본에서 올해 비동의간음죄가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만장일치로 통과됐습니다. 우리나라의 강간죄와 같은 '강제성교죄'를 비동의간음죄와 같은 '부동의성교죄'로 개정한 겁니다.

새로 도입된 부동의성교죄가 성립될 수 있는 '동의'의 기준도 8가지로 나눠 제시했습니다.

일본 '부동의성교죄' 성립 조건

1. 폭행 또는 협박을 이용하거나 이를 당한 것.
2. 심신의 장애를 발생시키는 것 또는 그것이 있는 것.
3. 알코올이나 약물을 섭취하게 하는 것 또는 그 영향이 있는 것.
4. 수면 및 그 밖의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것 또는 그 상태에 있는 것.
5. 동의하지 않는 의사를 형성, 표명 또는 완수할 틈이 없는 것.
6. 예상과 다른 사태에 직면하게 하여 공포를 일으키거나, 경악케 하는 것 또는 그 사태에 직면하여 두려움이 크거나 경악하고 있는 것.
7. 학대에 기인하는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게 하거나 그것이 있는 것.
8.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상의 지위에 기초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받게 될 불이익을 우려하게 하거나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동의하지 않는 의사를 형성, 표명 또는 완수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는 건 물론 미처 제대로 밝히지 못한 애매한 상황도 처벌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명확한 동의'가 없다면 '비동의간음죄'를 인정한다는 거죠.

일본보다 앞서 다른 해외 선진국들도 이미 비동의간음죄를 도입했습니다.

영국
피고인이 동의 여부에 대해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본다.

미국 뉴욕주
피해자가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묵인하지 않는 경우 처벌

독일
인식가능한 의사에 반하여 성적행위를 하면 처벌

스웨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과 성교하면 처벌


'동의' 판단, 법원 역할 커져야

비동의간음죄가 글로벌 트렌드라면 우리나라도 도입 논의가 활발해지고 결국 법제화가 되는 단계까지 갈 가능성이 작지 않습니다. 비동의간음죄 도입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동의'를 어떻게 판단하고 증명할 수 있는지 애매하다고 지적해왔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해외 사례들이 어느 정도 명문화된 동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수많은 사례를 일도양단으로 나누기는 어려울 겁니다.

일본 입법 과정 당시 해외사법소식 '일본 부동의성교죄 도입 사실상 확정'에서 이를 분석한 차기현 광주고법 판사는 "우리 형법 체계에 영향을 많이 준 일본 형법까지도 법개정이 이뤄진 만큼 국내에서 '비동의간음죄'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일본 법체계를 많이 따라간 전례가 있는 만큼 비동의간음죄 역시 도입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죠.

차 판사는 무엇이 동의이고 아닌지를 판별하는 데 결국 법원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차 판사는 "비동의간음죄 도입을 전제로 피해자 거부 의사 형성을 저해하는 유형력 등에 대한 구체적인 목록화를 통해 입법 단계에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며 "성범죄 입증 책임이 전환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피해자 내심 상태를 추단하기에 적합한 심리 방식을 체계화해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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