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년 전 '적폐'에서 대법관으로 [서초동에서]
입력 2023-07-21 13:42  | 수정 2023-07-22 10:21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관 취임식에서 권영준 대법관(왼쪽)과 서경환 대법관이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3.7.19
“서경환 대법관 취임, 사법부에 적지 않은 울림 줘”
6년 전 '사법부 블랙리스트' 당시 '적폐'로 몰려
서경환 대법관 취임, 사법부에 적지 않은 울림 줘”

"컴퓨터 강제 개봉 반대해 적폐로 몰렸던 서경환 부장판사가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대법관이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지난 19일 서경환·권영준 대법관이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법원 내부 시선은 온도 차가 있었습니다. 권 대법관에 대해 "언제라도 대법관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던 천재형"이라는 평가가 많다면 서 대법관을 향해서는 "대법관 자리에 오를 줄 예상치 못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서 대법관의 자격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법부 전체에 준 울림이 적지 않다는 목소리가 여러 곳에서 전해집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당시 강제 조사 위법” 소수 의견 내

불과 6년 전 일입니다. 2017년 법원에는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관리했다는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적폐청산'의 태풍이 사법부를 덮친 겁니다.

당시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는데 의혹 관련자의 컴퓨터를 당사자 동의 없이 강제 개봉해 조사하는 것을 놓고 논란이 증폭됐습니다. 조사를 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목소리는 높고 거칠었고, 다수는 침묵했습니다. 서경환 (당시) 부장판사는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 조사는 위법하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던 몇 안 되는 소수파 중 한 명이었습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작성자 동의 없이 컴퓨터 조사를 강행할 경우 일부 야당의원 등이 검찰에 고발할 것이고, 이 경우 검찰에서 비밀침해 여부를 수사하기 위하여 문제된 컴퓨터를 제출받아간다면, 정작 문제의 기조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파일들을 우리 법원에서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검찰과 국회의원(고발인)은 첨단기술로 포렌식해 보게 되지 않을런지. 그 과정에서 노출된 파일들로 인해 사법부에 부정적 영향은 없을지 하는 점입니다." (출처 : 코트넷, 2017년 12월)


‘적폐로 몰렸지만…6년 만에 대법관된 비결은

서경환 대법관 후보자가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2023.7.12
강경파는 서 부장판사를 '적폐'로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서 부장판사는 6년 만에 대법관이 됐습니다. 이번 대법관 임명제청을 놓고 용산 대통령실과 법원행정처는 '일촉즉발'의 갈등을 겪었습니다.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용산 대통령실에서 특정 정치 성향의 후보자를 제청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보도가 잇따르자 김 대법원장이 충돌을 막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서 부장판사를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습니다.

서 대법관은 이념 과잉의 시대에 소수파 생존법의 모범답안을 보여줍니다. 법원 관계자는 "서슬이 푸르던 시기에 서 부장판사가 거친 표현을 쓰지 않으면서도 설득력 있게 글을 쓴 것이 조직 내부에 상당한 공감대를 얻었다”고 기억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서 부장판사가 파벌에 관계없이 두루 좋은 인간관계를 가져가 비토 세력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서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과 성향의 차이가 컸지만, 2021년 일선 판사들이 투표하는 법원장 후보자 추천제를 통해 서울회생법원장에 임명됐습니다.

‘초라한 성적표 받은 김명수 대법원장…차기 대법원장 숙제는

김 대법원장의 임기는 오는 9월이면 끝납니다. 퇴임 성적표에 후한 점수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정치권은 온갖 이슈를 서초동으로 가져 오는데, 법원은 인사 편중과 특정 재판의 지연 등으로 독립성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김 대법원장 개인적으로는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형사 고발된 상태입니다. 한 나라의 대법원장이 거짓말 의혹에 휩싸인 것은 '망신거리일 뿐 아니라 "국회에서 (민주당 주도로) 법관 탄핵이 논의 중이라는 이유로 임 부장판사의 사표를 반려했다"는 발언은 특정 정파에 치우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결국 많은 시민이 이목이 쏠린 재판의 판사가 어느 단체 소속인지를 따져 묻는 세상이 됐고, 법원에 대한 신뢰는 크게 훼손됐습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서경환·권영준 대법관 취임식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과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2023.7.19
김 대법원장이 물러나면 보수 성향의 후임자가 지명될 가능성이 큽니다. 진보 성향 우위의 대법관 구성이 보수 성향으로 바뀌는 것이 보수층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법원의 정상화'로 이어질까요? 이념 지형이 보수와 진보 반으로 나뉘어 극렬히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또 다른 갈등을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법조계 관계자는 "차기 대법원장은 비록 보수 정권에서 지명됐지만, 누가 임명을 했는지 잊고 '법'과 '원칙'에 충실히 하는 것이 날로 심해지는 이념 갈등 속에서 법원이 가야 할 방향”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법은 진영논리 위에 있다'는 대원칙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보수든 진보든 법원은 외풍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것이 6년 전 적폐로 몰렸던 서 부장판사를 대법관으로 임명제청한 것이 김 대법원장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시사하는 바일 겁니다.

[이성식 기자 mods@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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