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노동 분야를 맡고 있는 사회정책부 박유영입니다. 방송에서 담지 못한 취재 뒷이야기를 [취재 백블] 코너에서 자세하게 풀어드립니다.
"사교육에 대한 서민들의 지나친 부담을 덜어 드리지 못하고 교육의 긍정적 변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서민들의 사교육 부담 경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0년 8월, 이주호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컴백한 이 부총리는 최선을 약속했던 '사교육 부담 경감'을 저해하는 원흉으로 돌연, '킬러문항'을 지목했습니다.
그것도 2024학년도 수능을 5개월 앞둔 시점에서 말입니다.
◇ Part 1. 지키지 못한 약속
시간을 돌려 지난해에 있었던 이 부총리의 두 번째 인사청문회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두 아이 입시를 치렀다는 학부모가 참고인으로 출석해 우리나라 입시 제도가 너무 자주 바뀌고 내용도 어렵다는 취지로 지적하자 이 부총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만약 장관으로 부임하면 입시제도는 정말, 국민들께서 너무 불안하지 않게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2022. 10. 28 인사청문회
관련 질의가 이어지자 한 번 더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입시의 안정화, 또 학부모들이 정말 너무 자주 바뀌는 입시에 (느끼는) 그런 피로감에 대해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 2022. 10. 28 인사청문회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능이 반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대통령과 교육당국이 수능의 문항과 출제 방식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고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을 경질하고 ▲수능 출제 권한을 가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감사하며 ▲입시학원과 유명 강사들을 동시다발로 조사하는 일은 여지껏 본 적이 없습니다.
수능을 다시 디자인하는 당국의 칼질이 서슬파랄진대, 수험생과 학부모가 혼란 없이 독야청청 시험 준비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교육부 말대로 킬러문항을 '핀셋' 제거한 뒤에 변별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내겠다는 건지, 그래서 어떻게 대비하라는 건지.. 수험생 입장에선 9월 모의평가를 받아보기 전에는 그저 감으로 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부 장관으로서 '학부모들이 피로감 느끼는 일 없도록' 하겠다며 내걸었던 '입시 안정화'와 '예측 가능한 입시'라는 이 부총리의 약속, 적어도 이번에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 Part 2. 거둬들이지 못한 말들
번복. 사전적 의미는 '이리저리 뒤집힘', '이리저리 뒤쳐 고침'입니다.
'킬러문항'에 대한 정의도, 수능에서 갖는 역할도, 교육부는 지난달을 기점으로 모두 번복합니다.
지난해 9월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 회의록입니다.
강민정 의원 : "학교에서 안 배운 거, 교육과정에서 안 배운 게 수능 문제로 나오니까 애들이 사교육으로 갈 수밖에 없고, 결국은 교육과정 바깥에서 수능 문제를 출제하는 걸 (교육당국이) 엄격하게 관리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교육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장상윤 교육부 차관 : "킬러문항은 교육과정을 벗어났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난이도 조절 내지는 변별력을 위해 (있는 문제)"
장상윤 교육부 차관 : "킬러문항은 교육과정을 벗어났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난이도 조절 내지는 변별력을 위해 (있는 문제)"
장 차관은 당시 위와 같이 반박했지만, 야당 소속인 강 의원의 발언은 지난달 대통령실이 윤석열 대통령의 '킬러문항 배제' 지시가 나온 배경을 설명하며 했던 말들과 놀랍도록 흡사합니다.
이어 일명 '킬러문항 방지법'을 대표 발의한 강 의원이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친 것을 평가원에서 출제하고 교육부는 그렇게 출제되도록 관리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이 법의 취지"라고 설명하자, 장 차관은 재차 "(평가원이) 지금도 그렇게 운영하고 있고 (교육부도 그렇게) 관리 감독을 하고 있다"고 맞받았습니다.
장 차관 발언 뒤 교육부 대입정책 담당 과장이 "킬러문항이란 게 교육과정을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고 여러가지 성취 기준을 복합적으로 엮어서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이라고 못박은 부분도 눈에 띕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교육부가 180도 태도를 바꾸고 이전 말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합니다.
올해 6월에 열린 교육위 법안심사소위 회의록입니다.
장상윤 교육차관 : (지난해 9월 발언은) 저희가 출제당국 입장만 고려한 답변이었지 않나 반성해보게 됐습니다. 실제로 교육과정 범위를 벗어난 수능 문항 출제 가능성을 간과했던 점 사과 드립니다.
강민정 의원 : 단 몇 개월 만에 동일한 법안에 대해서 이렇게 180도 다른 입장을 교육 주무부서로부터 듣게 된 것에 심대한 유감을 표합니다
강민정 의원 : 단 몇 개월 만에 동일한 법안에 대해서 이렇게 180도 다른 입장을 교육 주무부서로부터 듣게 된 것에 심대한 유감을 표합니다
지난달 28일 EBS를 방문한 이 부총리는 킬러문항을 '괴물 같은 문항'이라고 칭하며 "저희가 괴물을 키워왔다"는 말까지 남깁니다.
모두가 '심각한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여도 그런 게 아니라고 강변하던 존재가 오늘 갑자기 '괴물'이 되어버린 상황.
그저 "반성한다"는 말로 교육계 현장의 혼란까지 거둬들일 수 있을지, 그래서 "정책 방향에 백 번 공감하지만 왜 지금 이 시점이냐"는 수험생의 불만도 거둬들일 수 있을지.
평가원은 수장의 부재 속 당장 9월 모의평가부터 '킬러문항'을 뽑아내는 동시에, ‘물수능 논란은 피하면서, 상위권 변별력을 가리는 문항들을 학교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고난도 작업을 '잡음 없이' 수행할 수 있을지.
수험생과 교원, 입시계가 온통 9월 모의평가에 눈이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육부가 전례 없는 일들을 펼치며 구현하고자 했던 교육적 철학은 어떤 거였는지 이제, 검증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박유영 기자 / shine@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