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고 중대한 피해' '충분한 근거' 등…기준 자체가 모호
신상공개 기준이 여론에 의해 좌우된다는 연구 결과도
시민사회 "살인 피의자들은 일괄 신상 공개해야"
"사진과 너무 달라"…신상 공개돼도 실효성 논란
신상공개 기준이 여론에 의해 좌우된다는 연구 결과도
시민사회 "살인 피의자들은 일괄 신상 공개해야"
"사진과 너무 달라"…신상 공개돼도 실효성 논란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정유정(23)의 신상정보가 전날(1일) 공개됐습니다.
부산경찰청은 이날 오후 신상정보 공개심의위원회를 열어 정유정의 이름, 나이, 사진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부산경찰청의 신상공개 사례는 2015년 10월 5일 부산진구에서 발생한 실탄사격장 총기 탈취 피의자 신상공개 이후 8년여 만입니다.
"범죄의 중대성과 잔인성이 인정되고, 유사 범행에 대한 예방효과 등 공공이익을 위한 필요가 크다고 판단된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같은 강력 범죄로 법률에 따른 요건에 충족했음에도 범죄자의 신상이 공개되지 못한 사건들도 여럿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신상공개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과 여론에 의해 공개 여부가 좌우된다는 등 공개 기준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전 남편을 살해한 고유정(36), 계곡살인사건 피의자 이은해(31), 조현수(30),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전주환(32). / 사진 = 연합뉴스, 인천지검, 서울경찰청
최근 신상이 공개된 주요 사례를 살펴보면, ▲2023년 4월, 강남 납치·살해 사건 피의자 이경우(35), 황대한(35), 연지호(29) ▲2022년 12월, 동거녀와 택시 기사 살해 사건 피의자 이기영(31) ▲2022년 9월,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해 사건 피의자 전주환(31) ▲2022년 1월 전여자친구 살인사건 조현진(27) ▲2022년 1월 계곡살인사건 이은해(31) 조현수(30)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전 남편 살인 사건 고유정,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n번방' 개설자 문형욱, 전 여자친구 스토킹 살해 김병찬, 전 여자친구 가족 살해 이석준,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이승만·이정학 등의 신상이 공개됐습니다.
반면, 시민사회와 피해자들의 요청에도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지 못한 사건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17개월 입양아가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정인이 사건' ▲사실혼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낸 '양산 동거녀 살인사건' ▲의붓아들을 여행가방에 가둬 살해한 '천안 가방 살해'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강력범죄임에도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지하주차장에서 전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한 남성 ▲부산 서면에서 여성의 머리를 가격한 '돌려차기 사건' 남성 ▲4개월 영아 방치해 사망하게 한 친모 등에 대해서도 신상을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공개 기준 자체가 주관적·불분명'
특정 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을 살펴보면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 사건인 경우 △피의자가 그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우 △국민의 알 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피의자가 청소년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에 신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성폭력 범죄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5조에는 △검사와 사법경찰관이 성폭력 범죄의 피의자가 죄를 범했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 △피의자의 재범 방지 및 범죄 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 신상을 공개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피의자 신상공개 기준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겁니다.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 '충분한 근거'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라는 기준 자체가 불분명합니다.
신상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신상공개위원회 심의위원은 총 7명으로 구성됩니다.
이들 중 3명은 총경급 이상 경찰관, 4명은 시민단체 혹은 관련 전문가 등 외부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사안에 따라 인적 구성이 달라져 판단기준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신상공개 기준이 여론에 의해 좌우된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실제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최근 경찰대 소속 치안정책연구소가 발간한 '피의자 신상 공개 여부의 결정 요인에 관한 연구: 온라인 여론 데이터 분석을 중심으로' 논문에 따르면, 기사 댓글 수가 많은 사건일수록 범죄자의 신상 공개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상이 공개된 피의자들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는 사건 발생 후 13일차까지 평균 67.46건의 기사가 나왔으며 일 평균 8,104.15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반대로 피의자 신상공개가 이뤄지지 않은 사건의 경우 사건 발생 13일차까지 기사 수가 평균 67.77개로 신상이 공개된 사건과 비슷했지만, 댓글 수는 평균 950.31개에 그쳤습니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에서는 "적어도 살인 피의자들은 전부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강력범죄인데 형평성이 떨어진다", "공개 기준이 대체 뭐냐"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신상공개에 대한 객관적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아동학대범죄에 대한 신상공개 의무화 내용을 담은 특정강력범죄법 개정안을 발의했던 이주환 국민의힘 의원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강력 범죄 사건이 늘면서 국민들 불안이 가중되고 있지만 범죄자 신상공개 기준이 모호해 형평성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면서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신상공개 기준을 객관화해서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경찰청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1월 MBC 라디오에 출연해 "기준이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이 추상적인 기준을 구체화하기도 쉽지 않다"며 현실적인 한계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얘가 걔?"…피의자 신상 공개되도 문제
이기영이 택시 기사 살해 5일 후인 지난달 25일 한 음식점 폐쇄회로(CC)TV에 찍힌 모습(왼쪽)과 경기북부경찰청이 공개한 운전 면허증 사진. / 사진 = MBC 뉴스 방송화면 캡처, 경기북부경찰청 제공
피의자의 신상공개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공개된 사진과 실제 모습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겁니다.
신상공개가 결정된 피의자가 검찰에 송치될 때 얼굴을 공개하는데, 그때 당사자가 동의하면 체포 후 촬영한 현재 사진(머그샷)을 찍어 공개하지만, 거부하면 신분증 증명사진을 공개합니다.
여기서 피의자에게 동의를 구한다는 점 자체가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신상공개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면서, 국회에서 흉악범 신상이 공개될 때 실물을 알아볼 수 있도록 최근 촬영한 얼굴 사진을 사용해야 한다는 법안이 잇따라 발의됐습니다.
송연석 국민의힘 의원은 흉악범의 신상을 최근 30일 이내에 촬영한 사진을 사용하도록 하는 특정강력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안과 성폭력 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피의자를 식별할 수 있도록 사진을 촬영해 공개하는 규정을 추가한 특정강력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안 의원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피의자의 재범 방지, 범죄 예방을 도모하려는 신상 정보 공개의 취지를 달성하려면 최근 얼굴 공개를 통해 피의자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유나 디지털뉴스 기자 chldbskcjstk@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