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강세현의 재난백서] 그들이 고시원을 벗어나지 못 한 이유
입력 2023-05-06 13:00 
국일고시원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인 국과수 (연합뉴스)
벗어날 수 없었던 미로

새벽 5시, 복도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뜹니다. 그 순간 방 안으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오고 밖에선 불이 났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지만 좁은 복도는 이미 연기와 불길로 가득 찬 상태였습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찾아보지만 그 자리엔 단단한 벽이 눈에 들어옵니다.

2018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국일고시원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은 남성들이 머무르고 있는 3층, 그중에서도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301호에서 시작됐습니다. 출입구를 막은 불길은 삽시간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옆방으로 옮겨붙었습니다. 이 불로 7명이 목숨을 잃고 11명이 다쳤습니다. 79, 73, 63, 58, 56, 54, 35. 숨진 이들의 나이입니다. 피해자 대부분은 중년을 넘긴 사회 취약계층이었습니다.


창문이 깨진 국일고시원 (연합뉴스)
좁은 복도에 창문까지 없어

국일고시원 3층엔 무려 29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방은 가로 1.7m에 세로 2.1m로 딱 성인 한 명이 누울 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삽시간에 연기가 가득 찰 수 있었던 좁은 공간에 많은 거주자가 있었던 게 인명피해가 컸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더 큰 문제는 비좁은 복도였습니다. 국일고시원의 복도 폭은 80cm 정도로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동시에 여러 명이 나와 대피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죠. 여기에 문이 복도 쪽으로 열리는 고시원 구조도 대피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겁니다. 연기가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고 수십 개 문이 앞을 막은 비좁은 복도는 마치 미로처럼 보였을 겁니다. 숨진 7명 가운데 4명이 복도에서 발견이 됐는데 탈출을 시도하다 끝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창문이 없는 방이 많았던 점도 피해를 키웠습니다. 창문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중요한 대피 통로입니다. 제가 사고 당시 현장으로 취재하러 갔었을 때 창문은 대부분 깨져있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이 창문을 깨 그곳을 통해 거주자들을 대피시켰던 겁니다. 하지만 창문이 없는 방에서 살던 거주자들의 유일한 대피 통로는 연기와 열기로 가득 찬 복도뿐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른 창문이 있는 방과 없는 방의 월세 차이는 4만 원이었습니다.

큰 피해가 발생한 화재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 스프링클러의 부재. 네, 국일고시원 역시 스프링클러가 없었습니다. 국일고시원 업주는 서울시의 스프링클러 설치지원 사업을 알게 됩니다. 당시 서울시는 영세 고시원을 대상으로 고시원 측이 세입자를 위해 임대료를 5년간 동결하는 조건으로 스프링클러 설치를 지원해 주고 있었습니다. 2015년 업주는 사업에 신청해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지만,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 없었습니다. 건물주의 반대 때문으로 알려졌는데, 결국 불이 시작된 순간 천장에서 물은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2022년 4월, 2명이 숨진 영등포구 고시원 화재 (연합뉴스)
간이스프링클러 의무가 됐지만

국일고시원 화재를 계기로 늦게나마 법이 개정됐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6월 30일까지 고시원과 산후조리원 같은 숙박형 다중이용업소에 간이스프링클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설치지원 사업도 확대해 지난해 기준 고시원과 산후조리원 1,513개소 가운데 97%인 1,472개소에 간이스프링클러가 설치됐습니다.

효과도 있었습니다. 2021년 7월 서울 은평구 고시원에서 담뱃불로 발생한 화재는 간이스프링클러가 작동한 덕분에 인명피해 없이 꺼질 수 있었습니다. 소방청은 "설치 지원 사업 시행 전인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고시원 화재로 인한 연평균 사망자 수는 3명이었으나, 사업 시행 후 2019년부터 2022년 6월까지의 연평균 사망자 수는 0.75명으로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제도가 보완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지난해 4월 서울 영등포구의 고시원에서 불이 나 2명이 숨졌습니다. 간이스프링클러가 작동했지만 사망자가 나온 겁니다. 소방당국은 간이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릴 수 있는 용량이 작았기 때문에 불을 끄지 못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일반 스프링클러는 분당 약 80리터씩 20분 동안 물을 내보내지만 간이스프링클러는 분당 50리터씩 10분만 방수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으로 지어지는 고시원엔 간이스프링클러가 아닌 일반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고시원 화재 재발 방지 기자회견 (연합뉴스)
그들이 고시원을 벗어나지 못 한 진짜 이유

경찰 조사 결과 301호에 살던 70대 박 모 씨가 쓰던 전기난로에서 불이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고, 박 씨는 중실화 및 중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됐습니다. 하지만 박 씨가 조사 도중 암으로 사망하며 경찰은 박 씨를 공소권 없음으로 송치합니다. 그 역시 좁은 고시원에서 추위와 지병과 싸우고 있던 취약계층이었던 겁니다.

집값과 전월세 가격이 치솟으며 수도권에선 원룸 월세가 60만 원을 넘어섰습니다. 2018년 11월 9일 5시, 7명이 고시원을 벗어나지 못 했던 것처럼 아직도 많은 분들이 창문조차 없는 고시원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책임을 박 씨에 물을 수 있을까요?

[ 강세현 기자 / accent@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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