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검수완박법' 결정문에 드러난 헌재의 '멀티버스' [법원 앞 카페]
입력 2023-03-26 09:00 
유남석 헌재소장과 재판관들이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선고에 입장해 자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지난 12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95회 아카데미 시상식. 주인공은 말레이시아 배우 미셸 요(양자경)가 열연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무려 7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이 영화의 특징은 바로 다중우주, 이른바 멀티버스(Multiverse)를 소재로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세계가 다른 우주에 있다는 것, 그 세계에도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는 이론을 차용한 겁니다.

앞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비롯한 마블 영화 시리즈에서도 멀티버스가 소재로 쓰이는 등 멀티버스라는 단어는 이제 크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멀티버스가 영화에만 있었던 건 아닌 듯 합니다. 지난 23일 헌법재판소의 '검수완박법' 권한쟁의 심판 결정문을 보면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은 두 개의 멀티버스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검사 수사권 헌법에 없는 세계

첫 번째 멀티버스는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네 재판관이 바라본 세계입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검사들의 청구는 ‘각하되고, 국민의힘 의원들의 청구도 모두 '기각되는 곳이죠.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 이미선 재판관이 ‘법사위 통과 권한침해 확인 부분만 인용으로 의견을 달리했을 뿐 나머지는 네 재판관과 같은 의견을 내 대부분의 결정이 이들 재판관의 판단대로 됐으니 네 재판관을 편의상 ‘결정 재판관들이라고 불러보겠습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사진=연합뉴스)

결정 재판관들의 세계에서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없는 개념입니다. 오로지 헌법에 적힌 대로 ‘영장신청권만이 헌법이 부여한 권한일 뿐이죠.

헌법 12조 3항
체포ㆍ구속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헌법 16조
주거에 대한 압수나 수색을 할 때에는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따라서 수사권은 행정부에 속하는 권한에 불과합니다.

"수사권 및 소추권이 본질적으로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에 부여된 헌법상 권한이고 영장신청권이 검사에 부여된 헌법상 권한임은 다툼의 여지가 없으나 헌법이 수사권을 검사에게 부여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 이미선 재판관

당연한 이유로 행정부의 권한인 수사권을 어느 기관에 나눌지 정하는 건 입법부 즉 국회의 권한입니다.


"수사권의 구체적인 조정 배분의 문제는 헌법사항이 아닌 입법사항이고"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 이미선 재판관

따라서 검사의 수사 범위도 국회가 정해주는 대로 따르면 될 뿐입니다. 애초에 고유한 ‘검사 수사권은 존재하지 않는 만큼 헌재에 시정을 요청해도 ‘각하당하게 되죠.

반대쪽 세계의 '검사 수사권'

이제 방향을 돌려 다른 멀티버스로 가 보겠습니다.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의 세계입니다. 통과되지 못한 반대 의견을 냈으니 ‘반대 재판관들이라고 편의상 부르겠습니다.

이선애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반대 재판관들의 세계에서는 앞서 본 헌법에 나오는 ‘검사의 영장신청권에 대한 해석부터 차이가 납니다. 영장신청권이 곧 수사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헌법 제12조 제3항 및 제16조에 따라 검사가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을 위한 영장을 신청하는 것도 사법경찰관의 수사 중 신청에 따른 것이든 검사가 직접 수사를 개시한 사건의 수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송치한 사건의 보완수사를 하면서 청구하는 것이든 법관에게 영장발부를 신청하는 행위 그 자체로 범인을 발견 확보하고 증거를 수집 보전하는 국가의 수사기능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헌법상 수사권의 행사에 해당한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또 '영장신청권=수사권'을 행사하는 ‘검사는 헌법이 부여한 고유 권한을 보장받은, 행정부와는 별개로 헌법 기관으로 인정받는 ‘준사법기관입니다.

"헌법은 명문으로 검사에게 영장신청권 을 부여하고 있고 법률에서는 검사의 범죄수사와 공소제기 및 유지 등에 관한 직무와 권한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검사는 형사사법절차에서 수사와 소추기능을 담당하는 공익의 대표자이자 준사법기관으로서 권한을 자신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독임제 단독관청의 지위에 있다 따라서 검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독자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국가기관이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당연하게도 검사의 수사권을 헌법이 보장한 만큼 국회는 이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국회의 입법행위로 제 개정된 법률의 내용이 소추권 및 수사권을 행사하는 검사로 하여금 그와 관련된 절차적 기본권 보장의 의무를 준수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는 검사의 직무상 객관성과 중립성을 훼손하므로 검사가 준사법기관으로서 행사하는 권한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다고 볼 수 있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그런데 만약 국회가 검사의 수사권을 제한하는 검수완박법을 통과시킨다? 이는 헌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무효가 됩니다.

‘합법 탈당의 세계 vs ‘위장 탈당의 세계

무소속 민형배 의원이 23일 오후 본회의를 마친 뒤 '검수완박' 탈당관련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두 세계에서는 민형배 무소속 의원의 탈당도 정반대로 취급됩니다.

먼저 결정 재판관들의 세계에서 민 의원의 탈당은 ‘합법입니다

"민형배 위원의 탈당은 의원 개인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자율적인 결정으로 설령 민형배 위원이 비교섭단체 몫의 조정위원으로 선임될 목적으로 민주당을 탈당하였다 하더라도 제한하는 규정이 없는 이상 정치적 책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국회법을 명백히 위반하였다고 볼 수 없다."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

이석태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오히려 국민의힘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조정위원회에서 토론 등 정상적인 의사절차가 진행되지 못한 것은 청구인들을 포함한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의사절차 진행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

이종석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반면, 반대 재판관들의 세계에서 민형배 의원 탈당은 ‘위장탈당입니다.

"민형배 위원은 비교섭단체 몫의 조정위원으로 선임되어 조정위원회의 의결정족수를 충족시킬 의도로 민주당을 탈당하였고 법사위 위원장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도 민형배 위원을 조정위원으로 선임한 것임을 합리적으로 추단할 수 있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국회법도 위반한 걸로 취급됩니다.

"조정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실질적 조정심사 없이도 조정안의 의결정족수가 충족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것은 국회법상 안건조정제도의 핵심 기능을 무력화한 것이므로 법사위 위원장의 이 사건 가결선포행위는 국회법 위반의 정도가 중대하다."
-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결국 서로 정반대의 모습을 한 두 세계는 아래처럼 나타납니다.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없다
-수사범위는 국회가 정하는 것
-민형배 의원은 ‘합법탈당

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 재판관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명시
-국회의 수사권 통제는 제한적
-민형배 의원은 ‘위장탈당


이미선 재판관이 만든 현실 세계

이미선 헌법재판관 (사진=연합뉴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양쪽 모두와 다릅니다.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한 이미선 재판관이 다른 결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죠. 앞서 본 바와 같이 검사의 수사권에 대해 이미선 재판관은 결정 재판관과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없다고 본 만큼 검수완박법은 유효하게 됐죠.

반면 민형배 의원의 탈당을 두고는 ‘위장탈당이라는 반대 재판관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법사위 위원장은 민형배 위원과 같은 민주당 소속으로 이와 같은 민형배 위원의 탈당 경위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민형배 위원을 비교섭단체 몫의 조정위원으로 선임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표결 결과는 국회법에 반하여 조정위원으로 선임된 민형배 위원이 표결에 참여하여 의결정족수 충족과정에 왜곡이 발생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결국 조정위원회의 의결정족수에 관한 국회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이미선 재판관

그럼에도 이미선 재판관은 검수완박법을 ‘무효화는 하지 않아야 한다며 결정 재판관들과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헌재가 아닌 ‘국회가 해결할 사안이라는 이유입니다.

"헌법재판소로서는 피청구인의 정치적 형성권을 존중하여야 하므로 원칙적으로 처분의 권한 침해만을 확인하고 권한 침해로 야기된 위헌 위법 상태의 시정은 피청구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며"
- 이미선 재판관

‘검사의 수사권은 헌법에 부여되지 않은 만큼 국회가 정하도록 하는 세계, 위법적인 위장탈당을 한 건 맞지만 국회가 스스로 자정하길 기대하는 세계, 바로 이번 헌재의 결정이 만들어낸 현실 세계 유니버스(Universe)입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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