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이죠 지난 2010년 4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한 외제 스포츠카가 신호대기 중이던 차를 들이받는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사고를 낸 이 차량의 차종, 고급 스포츠카 브랜드 '페라리' 그 중에서도 창립 55주년을 기념해 출시된 한정판 '엔초 페라리'였습니다. 출고 당시 가격만 7억여 원에, 한정판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중고가가 오히려 20~30억 원대에 이르는 '초고급 슈퍼카'였습니다. 이런 슈퍼카가 교통사고를 냈다는 소식은 당시 큰 화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2011년, 경기 하남시의 한 창고에 있던 수십 대의 슈퍼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납니다. 700억이 넘는 부실대출로 퇴출돼 수많은 은행 이용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던 '도민저축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차량들입니다.
2021년 경기 하남시 도민저축은행 창고에서 발견된 고급 외제차들 (사진=연합뉴스)
언뜻 보기에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모두 한 사기범과 연결돼 있습니다. 바로 '슈퍼카 수리남'으로 불린 김재량 씨입니다.
슈퍼카 사기의 시작
1977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재량 씨는 2000년 대부터 슈퍼카 튜닝과 수리, 국내 직수입 업체를 운영했습니다. 이 업체는 당시 재벌2세와 연예인들도 찾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습니다.
사업 아이템을 찾던 김 씨는 두바이에서 슈퍼카가 저렴하게 나온다는 걸 알고 이를 국내로 들여와 비싸게 팔아 차익을 넘기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를 위해 믿을 만한 현지 동업자로 두바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인 목사 부부를 끌어들였죠.
그런데 이 목사 부부가 김 씨로부터 차량 대금 30~40억 원을 받아챙긴 뒤 정작 차량은 다른 나라로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김 씨는 뒤늦게 알았습니다. 김 씨 역시 고객으로부터 받은 대금인 만큼 당장 이 비용을 메울 길이 막막했죠.
이때부터 김 씨는 사기로 금액을 메우기로 마음먹은 걸로 보입니다. 사기당한 손해는 사기로 갚겠다는 거죠.
허점 노린 문어발 사기
김 씨는 고객 등 슈퍼카 소유자 중 매도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내가 차량들을 매장에 전시하고 위탁 판매해주겠다"고 속여 차량들을 받은 뒤 이 차들을 가지고 범행을 시작했습니다. 슈퍼카는 일반차량처럼 직접 중고차로 팔기 어려운 점을 노린 겁니다.
이어 김 씨는 지인들에게 "확보한 슈퍼카가 있는데 원래 슈퍼카 가격보다 싸게 팔겠다"며 꼬드긴 뒤 선금을 먼저 받는 식으로 차량 한 대를 여러 사람에게 판매하는 사기 행각을 벌입니다. 차량이 언제 오는지 물어보면 "차량에 문제가 생겨서 고치느라 인도가 늦어진다" 같은 말로 시간을 끌면서요.
심지어 자신이 운영하는 수리업체에 유명 연예인이 맡긴 차를 다른 사람한테 팔아버리는 일까지 저질렀다고 합니다.
부가티 베이런 (사진=flickr)
또 당시의 허술한 금융시스템을 이용하기도 했는데요. 지금처럼 금융기관들이 서로 고객의 신상과 신용정보를 공유하지 않던 시절이다 보니 김 씨는 한 차량을 가지고 동시에 여러 리스사에 심사를 넣고 여러 곳에서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이 시기에는 또 지금과 달리 승인이 나면 금융기관에서 차량 대금을 먼저 지급하는 '선송금' 방식이었던 만큼 이런 허점을 노린 거죠.
이렇게 여러 캐피탈사에서 60억 원 가량을 챙기는 등 이를 포함한 모든 사기 행각으로 김 씨가 빼돌린 돈은 110억 원에 달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차량들을 담보로 지인들로부터 고액의 돈을 빌리기도 한 김 씨는 마지막으로 이 슈퍼카들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한 저축은행 회장에게 담보로 준 뒤 불법대출을 받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로 도민저축은행의 채규철 회장이었습니다.
불의의 사고…그리고 도피
그렇게 사기 행각을 이어가던 김씨는 2010년 4월 불의의 교통사고를 내게 됩니다. 바로 처음에 언급한 '엔초 페라리' 사고였죠. 김 씨는 사고 직후 경찰이 오면 사기 행각을 들킬 걸 우려해 그 자리에서 차량을 버리고 해외로 도주해버립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피해자들의 신고로 수사에 나선 경찰이 사기 행각 정황을 파악해 김 씨를 입건했지만, 김 씨는 이미 해외로 도피한 뒤였죠. 김 씨가 홍콩으로 간 걸로 알려지면서 경찰은 인터폴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그 뒤로 김 씨의 행적은 한동안 자취를 감췄습니다.
수배 당시 지명수배 전단 (사진=서울 서초경찰서)
현실판 '수리남' 도피 생활
그렇게 12년이 흐른 뒤 올해 초 김 씨의 행방이 먼 아프리카에서 드러났습니다. 케냐에서 김 씨가 발견됐다는 겁니다. 케냐는 우리나라와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 씨 사건을 추적해온 탐정 유튜버 '카라큘라'는 김 씨를 목격한 한 현지 사업가의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김재량 씨가 케냐에서도 여러 사업을 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김 씨는 가명을 썼고, 케냐 고위급 관료나 군 장성들과도 인맥을 쌓았다고 합니다. 또 교회 같은 곳에 거액을 기부하며 이미지 관리도 했다고 사업가는 증언했습니다.
김 씨는 아내와 자식 등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고 가정부와 정원 관리사, 운전 기사 등을 고용하고 있다는 증언, 현지에서도 람보르기니나 벤틀리, 애스턴 마틴 같은 고급 외제차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마치 최근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에 등장한 인물이죠, 교회 목사이면서 마약 대부이기도 한 전요환 목사(황정민 분)를 연상케 할 정도죠.
하지만, 이렇게 김 씨의 도피행각이 알려지면서 인터폴이 나섰고, 김 씨는 케냐 나이로비에서 검거돼 지난 5월 25일 결국 한국으로 강제송환됩니다. 12년에 걸친 도피가 종지부를 찍은 겁니다.
12년 만에 법정에 서다
그리고 약 반 년이 흐른 뒤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녹색 수의를 입은 김 씨가 법정에 들어섰습니다.
이날은 김 씨에 대한 선고공판일이었습니다. 김 씨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였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사진=연합뉴스)
다만 이번에 기소된 김 씨의 범죄혐의는 단 2건, 피해자는 1명뿐입니다.
검찰 공소장에 드러난 김 씨의 범죄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 2009년 10월 20일 피해자 A 씨 사무실을 찾아가 "고급자동차 수입비용을 빌려주면 수입 후 판매하여 올해 12월 31일까지 변제하겠다. 대신 내 소유 엔초 페라리를 담보로 제공"하겠다며 11억 원 편취
- 2009년 11월 2일 같은 피해자에게 "돈을 추가로 빌려주면 내 부가티 베이런을 담보로 제공하겠다"며 13억 원 편취
- 2009년 11월 2일 같은 피해자에게 "돈을 추가로 빌려주면 내 부가티 베이런을 담보로 제공하겠다"며 13억 원 편취
하지만, 수사 결과 이 당시 김 씨가 언급한 '본인 소유 엔초 페라리'는 사실 다른 사람의 리스 차량이었습니다. 1년 뒤 교통사고를 낸 그 차량이기도 하죠. 또 추가로 담보로 제공하겠다던 부가티 베이런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담보를 맡기기로 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도민저축은행에 담보로 맡기게 되고 이후 도민저축은행 퇴출 뒤 창고에서 발견되는 그 차량이었죠.
결국 피해액 합계 24억 원에 대해서만 기소가 됐는데 김 씨는 재판 내내 '피해액을 변제할 재력과 의사가 있었다'며 사기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버지가 재력가인 만큼 충분히 자금을 받을 수 있었고, 또 자신의 리스사업 역시 당시 충분히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이유였죠.
법원은 이런 김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별도의 경제주체인 부친의 재력은 변제 능력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미 김 씨가 여러 사람과 기관으로부터 받아낸 돈의 채무액이 어마어마했던 만큼 변제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채규철 전 도민저축은행 대표는 "김 씨가 도민저축은행으로부터 빌린 뒤 갚지 않은 돈이 98억 5천만 원"이라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도민저축은행 부실대출 규모 700억 원 중 100억 정도는 김 씨가 빌려간 돈이었던 셈이죠.
'슈퍼카 사기범'이 받은 형량은?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조용래 부장판사)는 김재량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장은 김 씨의 죄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피고인에게 소유권이 없거나 이미 다른 채권자에게 담보로 제공하였거나 제공할 것을 예정하고 있었던 차량들을 마치 실효성 있는 담보로 제공하는 것처럼 피해자를 기망하였는바 그 범행 수법이 상당히 치밀하고 교묘하여 그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 후 해외 도피를 시도하면서 다수의 고급자동차를 반출하려고 시도하였고, 이 사건 이후로 10년 이상 해외에서 체류하면서 도피생활을 이어오는 등 그 범죄 후의 정황이 매우 불량하다."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 후 해외 도피를 시도하면서 다수의 고급자동차를 반출하려고 시도하였고, 이 사건 이후로 10년 이상 해외에서 체류하면서 도피생활을 이어오는 등 그 범죄 후의 정황이 매우 불량하다."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김 씨는 선고가 진행되는 내내 미동도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했는데요. 징역형이 선고된 뒤에도 특별한 표정 변화 없이 교도관과 함께 법정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