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토'로 대중과 실내악 가깝게 했듯이, 더 많은 작곡가의 음악 즐기게 할 것"
한국계 미국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창단 45주년을 맞은 타카치 콰르텟의 우리나라 6개 도시 투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 팬들은 잘 알지만, 용재 오닐은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비올리스트 최초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받았으며, 에미상과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은 물론, 지난해 '최우수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에서 수상한 명연주자입니다.4중주단에 합류한 뒤 한국을 찾은 용재 오닐과 MBN이 지난 4일 진행한 일대일 인터뷰 전문을 실어, 용재 오닐이 생각하는 음악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풀어보려 합니다.
먼저, 분위기를 푸는 간단한 질문(ice breaking questions)을 통해 들어본 용재 오닐의 취미와 비올라 이야기입니다.
Q. 용재 오닐 하면, 탁월한 음악적인 해석과 기량도 있지만, 지난 2020년 9월 명지병원에서의 '코로나19 특별음악회', 그리고 케냐 물부족 지역 주민 나눔 동참을 위한 마라톤 완주 등의 활동이 함께 떠오른다.
A. 명지병원을 찾았을 때는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죠. 아무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어떻게 퍼지는지 모를 때였고, 항공편이 없어서 좀 무서웠어요. 그래도 한국으로 올 수 있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비행기에도 평소 300명이 탄다면 40명만 탈 정도였거든요.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 환자와 함께 하는 음악회를 하자며 초청해주셨던 명지병원의 의사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
옥스팜에서의 케냐 물부족 지역 주민을 위한 마라톤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쉽진 않았습니다. 제가 레이스를 잘 뛸 때가 아니라서요.
Q. 달리기가 취미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마라톤 풀코스도 뛰더라. 달리기는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가? 달리기가 연주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A. 아마 2006년 중순이나 그 뒤인 2007년이었을 거예요. 제가 UCLA에서 교수직을 맡기로 했을 때, 그리고 디토를 막 시작했을 때였죠. 캘리포니아가 아름다워서 체육관 멤버십을 사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밖에서 뛰다가 20~25마일(32~40km)씩 달리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제가 마라톤도 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스페셜올림픽에서 달리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처럼 작은 몸을 가진 사람이 달리기에 좋은 것도 같아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나 봅니다. 마라톤을 뛰면 제 몸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나 의식적으로 생각해요. 35km를 넘어가는 구간부터가 큰 도전이죠.
스포츠 정신이 음악을 만드는 과정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스로를 어느 정도까지 향상시킬지 생각하면서 '자기 경쟁'을 하는 과정이 뒤따르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죠.
Q. 이번 연주에 쓰시는 비올라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궁금하다.
비올라와 리처드 용재 오닐 [사진=MBN]
A. 1600년대 비올라입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에서 420년 전쯤에 만들어진 거죠. 저는 4~5년 전부터 이 비올라를 썼는데요.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서 제 첫 번째 실내악 교수님이 쓰시던 비올라입니다. 이 비올라는 커티스 음악원이 소장한 것 중 하나라 학생들이 연주하곤 했는데, 학교가 돈이 필요해 비올라를 팔게 됐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을 채우려 했는데 그때 제 스승님이 샀습니다. 이후 수십년 동안 스승님이 이 비올라를 연주했는데, 은퇴를 하게 됐다며 어느 날 밤 저를 불러 이것으로 연주하라 하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다니는 특별한 악기가 됐는데요. 오랜 기간 동안 4중주에 쓰였던 악기라, 4중주에 잘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클래식 작곡가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지 한 번 알려달라.
A. 모든 작곡가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제 일이라 말을 하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바흐와 베토벤이 위대한 작곡가로서 제가 선호하는 작곡가 리스트를 꼽아보면 가장 상위권일 겁니다. 브람스와 슈베르트, 바르톡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곡가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인터뷰입니다.
Q. 지난 이야기이지만, 3번의 도전 끝에 지난해 그래미상 '최우수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때 느낌이 어땠나 먼저 묻고 싶다.
인터뷰 중인 리처드 용재 오닐 [사진=MBN]
A. 코로나19가 1년째 이어지고 있었죠. 삶의 많은 부분이 컴퓨터와 줌(zoom), 페이스타임 등으로 이어졌고, 그래미상을 타던 그해 저는 말 그대로 컴퓨터 앞에 있었습니다. 전날 리허설로 어떤 기술을 쓰라는 설명은 들었는데, 제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꿈만 같았고 믿을 수 없었죠. 경쟁자들이 엄청난 분이었습니다. 온라인으로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다른 수상자들과 만나야 했고, 이후 그래미 측이 "오닐씨 감사합니다. 로그아웃해도 됩니다"라고 해서 줌창을 닫고 컴퓨터를 닫았어요.
그날 제가 사는 콜로라도 집이었는데, 눈폭풍에 아주 두텁고 무거운 눈이 쌓여있을 때였습니다. 2.5피트(76cm) 정도 눈이 쌓여 다들 삽으로 눈을 치워야 했는데, 아무도 제가 방금 그래미를 탔다는 것은 모르잖아요. 그 순간은 아름다워 보였던 것 같아요.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어머니께서 전화주셨고 친한 친구들이 문자를 보내왔고, 언론 인터뷰는 이미 끝낸 그 상태, 완벽한 하루잖아요. 가장 인생에 아름다운 순간은 큰 사건이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아요. 중요한 큰 순간도 괜찮고 물론 매우 영광이고 죽는 날까지 기억할 겁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삶의 간단한 순간이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Q. 타카치 콰르텟에 합류를 결정한 이유도 자세히 묻겠다.
A. 저는 평생 음악인이 되는 것을 꿈꾸며 자랐습니다. 작은 마을의 어린 소년일 때부터 언젠가는 세상에 투어를 하며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사하겠다는 미친 꿈을 가졌죠. 제 인생과 커리어를 이 컨셉을 갖고 구조화 해나갔어요. 음악은 의사 소통의 오류로 가득찬 세상에서 사람들과 순수하게 소통하는 방식이잖아요. 저는 그 점을 매우 즐깁니다.
그래서 오래 전 줄리어드 음악원 학생일 때 타카치 콰르텟에 지원해 오디션을 봤는데 떨어졌고, 저는 당시 매우 무너졌고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1바이올린을 맡은 에드워드 듀슨베리가 저를 불렀어요. 지금의 콰르텟 동료이기도 하죠. 에드워드가 "리차드, 당신은 한국에서 신나는 커리어를 밟고 있잖아요. 유니버설과 계약도 했고, 콘서트도 하고 있고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데, 지금은 콰르텟에 합류할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어요. 지금 저는 제 인생을 즐길 시간을 주었던 콰르텟에 정말 감사합니다. 유니버설 CD도 없고, 비올라 리사이틀이나 앙상블 디토도, <안녕?! 오케스트라>도 없고 옥스팜 마라톤 완주나 적십자 홍보대사도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어떤 사람일지 상상이 안 되거든요.
그렇게 지금 타카치 콰르텟에 합류한 것은, 특히 코로나19로 예술 전반이 끔찍한 시간을 보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제 커리어로 보았을 때 콰르텟에 합류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디토 활동을 한 모든 이유는 실내악을 대중에 친근하게 하는 것이었고 13년 넘게 그 일을 했는데, 이제는 제가 콰르텟에서 그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Q. 이번 타카치 콰르텟 내한 공연의 곡을 선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A. 이번 프로그램은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진지한 프로그램입니다. 모짜르트와 베토벤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하이든은 4중주를 하나의 그의 장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Op. 77, No. 2를 연주하는 것은 매우 특별합니다.
두 번째 작품은 바르톡의 작품 현악4중주 6번인데, 타카치 콰르텟이 헝가리 리스트 아카데미에서 탄생한 만큼 바르톡의 음악은 '빵과 버터'와 같다고 할 수 있죠. 헝가리에는 게오르그 솔티 등 수많은 훌륭한 음악인이 있었고, 바르톡은 제게 모범이 되는 음악인이자, 제가 사랑하는 많은 면모를 갖고 있습니다. 바르톡은 자신의 나라의 음악을 좋아했고, 작은 마을들을 다니면서 에디슨 실린더로 사람들의 음악을 녹음했죠. 그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가 사람들의 노래를 보존해 완성했고, 내면에 흡수해 아름다운 작곡을 해냈습니다. 현악사중주 6번은 그가 아주 절망적인 시기에 썼던 마지막 현악사중주입니다. 1939년 스위스로 휴가를 가서 그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죠. 전쟁의 서막이었는데요. 그는 재빠르게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돌아가 미국으로 이민가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립니다. 이 콰르텟에는 그런 배경이 있죠.
제게 바르톡의 현악4중주 6번은 매우 특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비올라 자체만으로 이 곡을 시작하는데, '슬픈'이라는 뜻의 메스토(mesto)로 곡이 진행되는데, 매우 고립되고 쓸쓸한 절망적인 독백과 같거든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이 느껴집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작곡가들은 영웅이고 위대하다며 동화처럼 이야기하지만, 많은 작곡가들은 고통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가난 속에서 살았죠. 바르톡도 건강에 문제가 있었지만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르톡은 맨하튼 57가의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고통받으며 지내야 했어요. 작곡가들을 공부하다보면, 그들이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것이 제 마음을 정말 아프게 합니다. 매우 어두운 곡이에요.
프로그램의 마지막 작품은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D.810는 ‘죽음과 소녀로 매우 유명한 사중주곡이자, 어쩌면 현악사중주 곡들 중에 가장 좋은 곡이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곡의 이름은 그가 전에 썼던 곡에서 따왔죠. 슈베르트는 31년을 살면서 700곡 가까이 썼는데, 베토벤의 그림자 속에 살아야 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죠. 당시 사람들은 슈베르트가 보헤미안이고 아무것도 아니란 식으로 취급했어요. 이 곡은 죽음과 소녀가 있는데, 죽음이 소녀를 데려간다고 해서 소녀가 죽죠. 비극적인 이야기이고, 이것이 이 콰르텟의 핵심입니다. 이에 맞춰 변주가 이뤄지는데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이 죽고난 뒤와 슈베르트가 죽기 전까지, 그때가 음악사의 황금기였다고 이야기하죠. 다들 그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야 그 존재를 높게 사는 것 같습니다. 모두 훌륭한 작곡가들인데 말이죠.
Q. 솔로리스트로서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누군가가 보면 다 이룬 거 같아 보일지 몰라도, 계속 발전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 텐데.
인터뷰 중인 리처드 용재 오닐 [사진=MBN]
A. 비올리스트로서 독주는 매우 중요하고 훌륭한 일이죠. 하지만 실내악과 오케스트라도 중요하고요. 올해 저는 천재라 부를 수 있는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와 함께 콘서트를 했습니다.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리사이틀도 했죠. 스트라디바리(Stradivari)가 바이올린을 600개 제작했지만, 비올라는 12개만 제조했는데요. 그중 비올라 2개를 이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메디치가를 위해 만든 비올라라서 메디치 비올라라 불리는데, 제레미와 함께 한 리사이틀에서 이 비올라를 사용하게 해줬어요. 정말 엄청난 영광이었죠.
그리고 올해 오케스트라와 협연 계획들이 다수 잡혀 있는데요. 제 다음 스텝이 저는 협주곡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음악의 미래는 아직 살아있는 작곡가가 쓴 새 협주곡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젊은 비올리스트들이 연주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제 새로운 미션은 그런 더 많은 음악을 가져오는 것이고, 사람들이 "비올라는 바이올린보다 못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게 아니라, 20년 안으로 제가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더 많은 젊은 비올리스트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되길 바랍니다.
Q. 젊은 음악가, 특히 한국인 연주자들이 요즘 세계적으로 비상하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A. 피아니스트 임윤찬 군을 보면 18살에 불과한데 수십년에 한번 나타날 만한 신동이죠. 정말 훌륭합니다. 그런데 복잡한 질문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타고났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키워진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저라면 부분적으로 타고났지만, 조금은 더 키워진 것이라 말할 겁니다. 한국의 음악 교육 시스템은 아마 전세계에서도 꼽힐 정도로 대단하거든요. 그렇다보니 젊은 예술인들이 경이로운 수준으로 자라납니다. 어쩌면 또 타고난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죠. 음악의 가치를 알아주는 나라에서 태어나서요. 한국이 인상적으로 예술 방면의 길을 이끌고 있고, 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미래라고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스스로를 선배 예술가라고 칭해보자면, 저는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축하해주는 일도 훌륭합니다. 세상을 다니며 예술을 알리려면 유명인이 되는 것이 필요하죠. 그런데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대중이 주고 지원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유명한 사람이든지, 유명한 사람이 아니든지 그들의 콘서트로 찾아가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대회에서 우승하지 않고도 놀랍도록 대단한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모두 밖에 나가서 음악에 기반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예술가들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고 싶어요.
이 세상에 음악 같은 게 없잖아요. 한번도 갖지 못했던 친구와도 같죠. 제가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행복한 순간에도, 그 친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음악만 켜면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죠. 책 읽기와 같지만 더 깊은 책 읽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이 필요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거든요. 듣기만 하면 되는데, 그래서 저는 정말 마법과 같다고 생각해요. 모두 책을 읽고, 미술관을 찾아가는 것처럼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더 알아보려 해보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저 음악을 들어보면, 그 음악이 모든 것을 말할 겁니다.
Q. 대회에 나가 우승하지 않은 모든 음악인들의 연주를 들어주는 게 진정한 응원이자 지원이 되겠다.
A. 현대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을 구별하고, 넘버원(No.1, 1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 1위란 주관적이고 객관적이지가 않아요. 주관적인 정보와 감정에 의거해 결정이 이뤄지거든요. 그럼 2위, 3위는, 그리고 5, 6위는요? 심사위원과 판정 내리는 이들의 선호도로 더 값어치 없는 사람으로 결정이 되고 있어요. 마치 '난 빨강이 좋아'라는 사람과 '난 파랑이 좋아'라는 사람처럼요. 파랑을 좋아해 1위가 됐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빨강이 더 별로인 건가요? 그저 다른 거죠. 예술은 스포츠와 다르게 양적으로 계산이 가능하거나 완벽한 우승자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예술의 우승자인 사람은 없어요. 우승자가 있다고 하면, 음악 그 자체여야 하죠. 그렇지 않나요? 우리 모두 음악을 위해 사는데, 우리가 아무리 재능 있고 똑똑하다고 해도 작곡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작곡가들은 수백 년 전에 곡을 썼는데, 그 곡을 다시 들으면 꼭 새 것 같죠. 그런 것이 천재적인 것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보통 1년이나 2년, 5년, 10년만 지나도 이런 말을 하죠? "어우 그게 10년 전이었나? 너무 오래됐고 지겹다. 어떻게 내가 그런 것을 좋아했던 걸까?" 이렇게 말이죠. (웃음) 그런데 우리가 수백 년 전 음악을 듣고도 여전히 "와" 이런 반응을 보이잖아요. 그러니, 결론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축하해줘야 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일,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이야기한 대로 재능 있는 사람을 잘 키우고 돌봐주는 일이 중요하다. '용재'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강효 교수님과의 교류는 어떠한가?
비올라를 연주하는 리처드 용재 오닐 [사진=MBN]
A. 가르친다는 것은 부모가 되는 일과 조금 닮은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주셨던 것인지 점차 깨닫게 되죠.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주셨는지 전혀 몰랐다가 말이죠.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야 전에 매일 조금씩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깨닫죠. 그때가 사실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인데 말입니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람이 떠나간 뒤에야 깨닫고는 해요. 인간 본성의 슬픈 부분이죠. 그런데 가르침에 있어서도 저는 비슷하게 깨닫고 있어요. 스승님은 우리에게 씨앗을 뿌려줍니다.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지식과 지혜와 아름다움을 전해주신 겁니다. 그것도 무료로요. 그저 주신 거예요. 사실 저도 과거에 그랬고, 젊은 사람들은 "아 좋네" 그러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이 들고 직접 가르치게 되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이 가르침은 어떤 사람이 내게 준 가장 훌륭한 선물 중에 하나였구나' 이렇게 말이죠.
강효 교수님은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세요. 교수님은 완전히 신사이셨고, 매우 사랑해주시고 또 배려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한국에는 연장자에 대한 우대와 선생님을 공경하는 그런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데, 강 교수님은 절대 그런 문화를 이용하려 하거나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매우 격의 없게 편하게 대하도록 하셨고, 단순히 교수님의 나이 때문에 제가 벽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이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가르치는 방식을 좋아하는데요. 왜냐하면 가장 위대한 선생님들은 그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가르침을 주는 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념에 대해서나,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직접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모범이 되는 그런 분들이요. 강효 교수님은 수없이 많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 등을 가르쳤고, 점잖게 그분의 삶을 사셨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너무 감사드려요. 제가 한국에 또 다시 온다면 가까운 미래에 아카데미 등 일로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세종솔로이스츠(줄리어드 음악원 강효 교수가 창설)와의 마지막 연주가 당시 미국에서 부통령인 조 바이든 앞에서 외교적인 투어를 하기로 하면서 했던 것인데요. 그때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오기로 돼있었지만 너무 바빠서 오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현재 미국 대통령인 바이든을 그때 만났던 것이 되었네요. 세종과 다음 프로젝트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곧 맞이할 수 있길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Q. 한국의 관객 문화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한국은 용재 오닐에게 어떤 나라인가?
A. 제가 얼마 전까지 일본에 있었던지라, 비교 대상이 바로 떠오르는 대로 말할게요. 관객들이 반응하는 방식에는 재미난 차이가 있습니다. 한 예로, 미국에 가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데, 기립 박수를 정말 많이 칩니다. (웃음) 영국이나 독일 등 유럽을 가면 기립박수는 많지 않은데, 박수를 계속해서 치고 앙코르를 외치죠. 일본에서는 콘서트가 끝나고 한번 더 다시 부릅니다. 하지만, 끝에는 기립 박수는 없고 박수만 계속 치죠. 그리고 한국은, 꿈과 같아요. 관객들이 좋아했을까, 싫어했을까 추측해볼 필요도 없죠. 소리 지르고, 응원해주고, 앙코르도 외쳐줍니다. 관객들을 정말로 느낄 수가 있어요. 제가 사람들에게 늘 말해온 게 있는데요. 이곳으로 한번 와서 (한국의 공연장 분위기를) 경험해보면, 다른 곳으로 가기가 매우 매우 어려울 것이란 말을 꼭 하곤 했어요. 최근 20년 동안은 제가 한국을 간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너 (한국으로) 간다고 하니, 행운이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행운인 것을 늘 알고 있었어요. 당신만 몰랐을 뿐이죠"라고. (웃음)
저는 제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한국에서의 공연이 참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위대한 선물을 받았잖아요. 강효 교수님께서 제게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저희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을 소개해줬죠. 한국에서 저와 어머니의 시작은 비극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비극이다, 역경을 극복했다' 이런 말을 듣고는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이야말로 어떤 일이 사람에게 일어나더라도 뭉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범이 되는 나라라고 세계에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께서 못 이루신 꿈을 제가 계속 살려나가는 게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가족의 꿈도 살려가고요. 비록 제 가족은 매우 매우 작고(웃음) 아마 거의 다 돌아가신 것 같지만요.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저 우리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을 살아가고,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웃음)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