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industry'는 산업? 공업? 론스타 ISDS 결과 갈랐다
입력 2022-09-05 06:02  | 수정 2022-09-05 09:14
론스타-외환은행 [사진제공=연합뉴스]

'industry'. 지난달 31일 10년의 다툼 끝에 한국 정부 책임을 일부 인정하며 종결된 '론스타 ISDS' 결론을 가른 단어다. 'industry'는 1976년 9월 발효된 구(舊) 한-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협정(BIT)에 등장한다. 사전적으로 '산업'과 '공업'의 의미를 모두 가지는 이 단어의 해석을 놓고 한국 정부와 론스타가 팽팽히 맞섰다.
산업이냐, 공업이냐에 대한 중재판정부 판단에 따라 한국 정부 책임을 묻는 범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어 양측이 공방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정부 측은 "임업, 농업 등과 같은 층위의 '공업'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론스타 측은 "금융업 등 세부 산업을 망라하는 높은 층위의 '산업'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 한-벨 투자협정 협정 거론 이유는

론스타는 2012년 11월 "외환은행 투자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협정을 어겼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46억7천950만 달러(약 6조원) 규모의 ISDS를 제기했다.
미국 텍사스에 본사를 둔 사모펀드 론스타가 낸 ISDS에서 뜬금없이 한국과 벨기에가 맺은 협정이 나오는 이유는, 론스타가 2003년 한국에서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 벨기에 국적의 자회사(LSF-KEB)를 통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벨기에와 서로의 투자자를 공평하게 대우하자며 투자 보장 협정을 체결해 놓고 론스타(의 벨기에 자회사에 대한) 외환은행 투자 승인을 지연하고 차별적 과세를 했다. 협정 위반으로 한국이 배상해야 한다"는게 론스타의 제소 취지다.
ISDS(투자자-국가 국제투자분쟁)는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법령이나 정책으로 피해를 봤을 때 국제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중재판정부는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국의 투자협정 위반이나 차별대우가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본다.

◆ 두 번 체결된 한-벨 투자협정, 어떻게 다르길래

한-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협정은 두 번 체결됐다. 각각 1976년 9월과 2011년 3월에 발효됐다. 2011년 일부 내용이 갱신된 신(新) 협정이 발효되면서 1976년 구 협정을 대체했다. 신·구 협정 모두 투자국이 외국 투자자를 내국인과 동일하게 공평히 대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협정은 내용상 몇가지 차이가 있는데 그 중 핵심은 보호 대상으로 규정한 '투자' 범위다.
구 협정은 농업(agriculture), 광업(mining), 임업(forestry), 통신업(communications), 관광업(tourism)과 함께 'industry'까지 총 6대 산업에 대한 투자만 협정을 통해 보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협정 체결 당시 당사국들이 주력으로 삼던 산업 위주로 구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신 협정은 이 범위를 크게 넓혔다. '어느 한쪽 체약당사자의 투자자가 다른 쪽 체약당사자의 영역 안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모든 종류의 자산'을 보호 대상 투자로 개정했다.
◆ 론스타의 금융업, 구 협정 보호대상 'industry' 포함 여부 공방

론스타의 투자행위는 금융업 범주에 속한다. 2011년 신 협정이 금융업을 포함하는 데는 양측 이견이 없었다. 쟁점은 구 협정이 금융업을 보호 대상으로 포함했는지 여부였다.
구 협정의 'industry'를 금융업을 망라하는 '산업'으로 본다면 외환은행 인수 과정이 모두 협정 관할에 포함돼 한국 정부의 협정 위배 행위가 있었는지를 중재판정부가 하나하나 따져야 한다. ISDS 청구 시발점이 된 외환은행 인수는 2003년 완료됐고, HSBC와의 매각협상은 2007년부터 2008년 사이 진행됐다. 외환은행을 최종적으로 하나금융에 넘긴 시기는 2012년이다. 반대로 'industry'를 '공업'으로 보고 금융업이 구 협정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신 협정이 발효된 2011년 3월 이후의 투자(하나금융에 외환은행 매각) 에 대해서만 판단하면 됐다.
론스타와 한국 정부는 각각 이렇게 주장했다.
"1976년 구 협정이 투자 보호 대상으로 명시한 'industry'는 금융업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산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론스타가 영위하는 금융업은 1976년부터 쭉 투자 보호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한다. 2011년 협정이 갱신되기 이전에 이뤄진 론스타의 외환은행 투자(외환은행 인수 및 HSBC와의 매각협상)도 구 협정에 의해 보호된다. 또 2011년 신 협정은 소급적용 가능하며 소급적용 되지 않더라도 한국 정부 조치는 협정 발효 이후에 계속된 복합적 위법행위에 해당해 협정 적용이 가능하다." (론스타 측 주장)
"협정은 보호하는 '투자' 범위로 농업·광업·임업·통신업·관광업과 함께 'industry'를 명시했다. 산업 세부 분야를 하나씩 명시한 맥락을 고려하면 여기서의 'industry' 역시 산업 하위 분류인 '공업'을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협정 한국어 번역본에도 '공업'으로 적혀 있다. 금융업은 당시 협정 보호 대상이 아니며, 2011년 협정이 갱신됐을 때부터 비로소 보호대상에 포함됐다. 2011년 이전 투자행위는 불소급 원칙에 따라 협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 주장)
◆ ISDS 중재판정부 판단은..."'공업'이 맞다"

중재판정부는 이 쟁점에서 한국 정부 손을 들어줬다. "industry를 '공업'으로 해석해야 하며, 1976년 구 협정 보호대상에 금융업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신 협정이 발효된 2011년 3월 이전의 투자 및 세금에 대한 론스타 청구는 모두 기각됐고, 하나금융에 외환은행을 매각한 건만 '한국 정부가 협정에 위배해 불평등한 대우를 했는지' 판단 대상이 됐다. 중재판정부는 "외환은행을 하나금융에 매각할 때 한국 정부의 심사 연기와 매각가 인하 압박으로 손해를 봤다"는 론스타 주장을 일부 인용해 매각가 하락분의 절반인 2억1650만 달러를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배상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이자까지 포함한 배상 총액은 원화값 1350원 기준 31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만약 중재판정부가 론스타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투자보호 의무 적용 기산점이 크게 앞당겨져 외환은행 인수와 HSBC 매각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투자협정 위반 여부까지 판정 대상에 포함돼 배상액 규모가 크게 확대됐을 가능성도 있다.
◆ 론스타 뒤에도 ISDS 6건 줄줄이..."페이퍼컴퍼니 제외 조항 추가해야"

10년을 끌어온 론스타 사건이 마무리됐지만 여전히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S)이 6건 남아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미국 사모펀드 엘리엇·메이슨, 스위스 승강기업체 쉰들러 등 외국 투자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S 6건이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한국 정부에 청구한 금액은 총 12억달러(1조6000억원)가 넘는다.
론스타 ISDS 사건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일각에서는 론스타 사건을 계기로 'ISDS가 투자자에게만 유리한 제도'라며 ISDS 제소 근거가 되는 조항을 투자보장협정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국제협정은 체결 당사국에 상호 공통 적용되는 만큼,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한국 기업이 외국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당했을 때 이를 ISDS로 구제할 수 있는 길도 막아버리는 셈"이라며 "ISDS 조항은 유지하면서 한국 정부의 ISDS 대응 능력을 키우는 게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신·구 협정 모두 한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투자자가 상대국에서 투자할 때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면 ISDS를 제기할 수 있다는 근거 조항을 두고 있다.
다만 현행 협정이 규정한 '투자'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페이퍼컴퍼니 배제 조항이 없어 한국 정부가 무분별한 ISDS에 노출돼 있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0년대 이후부터는 투자보장협정에 페이퍼컴퍼니 배제 조항을 마련하는 게 국제적 추세"라며 "현행 한-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협정도 변화된 환경에 맞게끔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ICSID에서 한국인 최초로 중재위원을 지낸 신희택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센터 의장은 "과거의 투자보장협정이 단순한 조항으로 구성되는 등 투자자 보호에 방점을 찍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정부의 방어권을 확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며 "재협상을 통해 페이퍼컴퍼니를 투자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는 '혜택의 부인'같은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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