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서울 성균관 문묘(文廟) 내 수령 400년짜리 은행나무가 가지 정리작업 중 또다시 훼손됐다. 한 달여 전에도 문화재청과 종로구청이 위탁·관리하며 진행한 작업에서 연달아 훼손 사고가 발생하며 성균관 측이 반발하고 있다.
최근 '우영우 팽나무'와 청와대 반송 등이 천연기념물로 예고된 가운데 문화재의 부주의한 관리에 따른 훼손 사고가 잇따라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27일 성균관에 따르면 문묘 안에서 지난달 1일 지지대 교체작업 과정에서 부러진 대형 은행나무 가지를 정리하는 작업이 26일 진행됐다. 나무 수리·보수업체가 굴착기로 부러진 가지를 나무에서 떼어내던 중 제거한 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주변 가지를 손상하는 바람에 표피가 심하게 벗겨져 너덜너덜해진 것.
훼손 사고가 반복된 이 나무는 '서울 문묘 은행나무'로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수령은 약 400년 정도이고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는 12m에 이른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 함께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균관 측은 잇따른 훼손 사고가 작업 중 단순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안전 절차를 지키지 않아 벌어진 '인재(人災)'라는 입장이다.
지난달 1일 지지대 교체작업 때는 기존 지지대를 제거하기 전 대체할 지지대를 먼저 설치해야 했지만 작업을 강행해 가지가 부러졌다. 26일에도 부러진 가지가 워낙 무겁고 크기 때문에 제거 작업에 앞서 쇠줄 같은 장치를 나뭇가지에 묶어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작업 과정에서 묵살됐다고 성균관 측은 주장했다..
성균관 관계자는 "문화재청 쪽에서는 앞으로 (은행나무와 관련해) 무슨 작업을 하더라도 책임자를 입회시키도록 한다고 했는데 작업 당시 문화재청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종로구청 직원 1명만 있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훼손된 가지에 대해 랩핑 작업 등 긴급조치를 완료했다"며 "지난달 1일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인재에 따른 사고로 보고 해당 업체를 작업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이 업체에는 행정처분이 내려질 것"이라고 밝혔다.
정비공사중 훼손으로 공사가 중단된 김해 구산동 지석묘 현장. <사진제공=문화재청>
앞서 세계 최대규모 고인돌로 통하는 김해 구산동 지석묘(경상남도기념물 제280호)도 정비공사 과정에서 훼손되면서 관리 책임이 있는 김해시에 대한 경찰 조사가 시작된 상태다.지난달 김해시는 지난 2020년 12월부터 정비 공사를 하면서 묘역 바닥에 깔려 있던 박석(薄石·얇은 돌)들을 모조리 빼서 보존처리 후 다시 박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박석 아래 청동기 시대 문화층(유물 존재 가능성이 있는 지층)도 훼손됐다. 김해시는 문화재청과 사전협의도 없이 원형 보존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흙부터 파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구산동 지석묘는 지난 2006년 김해 구산동 택지지구개발사업 당시 발굴된 유적이다. 학계는 덮개돌인 상석(上石)의 무게가 350t이고,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 묘역 시설이 1615㎡에 이르는 이 유적이 가야문화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유물로 간주해 왔다.
한편 청와대 경내에 있는 보물인 미남불 앞 시설물을 파손한 50대 여성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겨졌다.
서울 종로구 청와대가 시민들에게 개방된 10일 오후 관저 뒤편 언덕에 보물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미남불)이 전시돼 있다. 2022.5.10 이승환기자
27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종로경찰서는 청와대 관저 뒤편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앞에 놓인 기물을 손상한 50대 여성 A씨를 기소 의견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A씨는 지난 5월 청와대 개방후 경내를 관람하던 중 불상 주변 불전함을 손으로 넘어뜨려 그 옆에 있던 사기그릇을 파손한 혐의를 받는다. 불상과 불전함이 훼손되지는 않았다.A씨는 관람객들이 불상을 향해 절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 범행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2018년 보물로 지정됐다. 통일신라 불교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로 '미남불'로 불리운다.
이 불상이 일제강점기 불법으로 경주에서 서울로 반출됐다면서 경주소재 시민단체들이 불상의 경주 이전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청와대에 남아 역사적 상징적 역할을 맡게 됐다. 미남불 원봉안처가 명확하지 않고 가장 유력한 후보지인 경주 이거사터마저 정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됐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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