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골목길 불빛으로 추억의 풍경을 밝히다
입력 2022-07-28 14:46 
`어나더 월드` 앞에 선 정영주 작가 [사진 제공 = 학고재]

이제는 사라져가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가파른 언덕길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산 능선 너머로 해가 저문다. 담벼락에는 낙서가 있고,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대문으로 뛰어나올 것 같다. 어둠에 내려 앉은 인적이 드문 길을 가로등 불빛만이 밝힌다. 아스라한 추억을 소환하는 이 골목길은 작가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 풍경이다.
서울 학고재 갤러리 본관에서 '달동네 작가' 정영주(52)의 개인전 '어나더 월드'가 27일부터 8월 21일까지 열린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그린 신작 28점이 걸렸다. 정영주는 2008년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후부터 서울 상계동과 부산 등 유년시절 가족과 살았던 달동네 풍경을 작업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26일 만난 정 작가는 "집을 하나의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힘든 시기에 옛 집과 골목길을 그리면서 스스로 마음의 치유를 받았다. 집을 표현하기에 한지의 구김이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다.
한지를 오려 붙이는 파피에 콜레 기법이라는 노동집약적 작업으로 탄생한 작업이다.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린 후 지붕, 집, 돌계단, 언덕의 형태로 구겨서 접은 한지를 붙인다. 조각칼로 집의 모양을 새긴 뒤, 아크릴 물감을 칠한다. 겹겹이 종이로 쌓아올린 마을인 셈이다. 현실에선 달동네를 만나긴 쉽지 않다. 작가는 판자촌을 갈 때마다 사진을 찍고 재구성을 해서 캔버스에 옮긴다고 설명했다. 상상의 풍경을 그린 뒤 마지막에 빛을 그려넣는다.

사계절 연작은 여름부터 봄의 순서로 걸렸다. 정 작가는 "봄부터 겨울로 향하는 끝을 표현하지 않고 순환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에는 여름을 그린 작품이 많아서 푸른색이 주조를 이룬다"고 말했다. 1달 반이 걸려서 완성한 가장 큰 200호 크기의 '어나더 월드'는 전시장의 입구에 걸렸다. "내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지치고 힘들 때 돌아가면 언제든 문 열고 반겨주는 고향집 같은 편안함을 얻게 하고 싶다"라고 설명했다.
골목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따스하게 느껴지는 건 새어나오는 불빛 때문이다. 정 작가는 "집을 10년 넘게 그리다 보니 작품이 많이 밝아졌다고 하더라. 빛도 희미하고 숨어 있었는데 지금은 더 밝고 선명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허수영 `우주 02` [사진 제공 = 학고재]
같은 기간동안 학고재 갤러리 신관에서는 청년작가 단체전 '살갗들'이 나란히 열린다. 회화라는 손에 잡히는 '살갗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허수영(38)의 '우주' 연작은 캔버스 속으로 방대한 우주를 그려넣었다. 화려한 빛을 발산하는 별빛들을 두터운 붓터치로 그린 '우주 03'은 위아래 구분이 없어 일부러 작품을 거꾸로 걸었다. 바다의 모래처럼 별과 은하가 산재한 '우주 02'를 "우주의 은하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이우성 `나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사진 제공 = 학고재]
5년만에 청년 그룹전에 다시 초대된 이우성(39)은 대표적인 작업인 청춘들의 단상 대신 정적인 풍경을 그린 2점을 새롭게 가져왔다. 강원도 태백에서 만난 터널을 환상적인 터치로 그린 '지나치게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과 난지 한강 공원을 그린 '나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를 걸면서 "몸을 움직여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장재민 `수족관` [사진 제공 = 학고재]
풍경을 그려오던 장재민(38)은 수족관을 자유분방한 형태의 추상으로 변형시킨 '수족관'과 '꽃병 #5'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는 "디지털의 시대에 더 인간적인 제스처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박광수 `구리 인간` [사진 제공 = 학고재]
밴드 혁오의 앨범 '톰보이'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던 박광수(38)는 강렬한 붉은 색조의 인물화를 그렸다. '구리 인간'과 '수집가'는 신과 인간, 창작자와 작품을 은유한다. 작가는 "만들어진 자와 만드는 자의 관계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김은정 `여름, 봄` [사진 제공 = 학고재]
북악산과 미얀마의 선셋힐이 뒤섞인 김은정(36)의 '여름, 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풍경화다. "살아본 적 없는 시절과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그린 작업"이라 말했다.
지근욱 `팽창하는 원기둥 04-22` [사진 제공 = 학고재]
지근욱(37)은 색연필을 기계적으로 반복해 그어 화면을 채운 기하학적인 추상화 7점을 걸었다. '팽창하는 원기둥 04-22'는 원기둥처럼 양감을 만들어내고 '유동하는 관 07-22'는 선으로 채워진 타원이다. 그는 "물리적인 세계관에 관심이 많다. 닫혀있지 않고 열린 세계에서 확장하는 물질 세계를 감각하는 추상이다"라고 설명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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