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끈 쥔 주먹들 54개가 철판 위에 한가득이다.
각 주먹들은 30~70㎝ 크기도 다양하고 손가락 형태도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세밀하고 어떤 것은 뭉개져서 손가락 구분조차 모호하다.
김성복의 가변설치 작품 '누구를 위한 옳음인가'(2022)는 플라스틱의 일종인 필라멘트(PLA) 재질을 3D프린트로 찍어내고 다듬어 각양각색의 주장을 주먹 형상으로 표현했다. 소재 본연의 색깔을 살려 흰색이나 분홍빛으로만 표현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주장을 형상화하고 싶어서 질감과 양감을 차별화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기획부터 완성까지 2년 가까이 걸린 최신작이다. 약 2년 전부터 3D프린팅 작업에 도전한 작가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보다 자기의 욕망을 분출하는 행태에 주목했다.
김성복의 가변설치 `누구를 위한 옳음인가`(2022) 필라멘트 [사진 제공 = 청작화랑]
그것은 무언가 이루고 싶은 욕망이 '꿈', 각자의 욕심이 표출되는 '탐욕',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 등 3가지 핵심 주제로 연작이 탄생한 과정으로 이어졌다.중견 조각가 김성복(성신여대 조소과 교수·57)작가의 작품 17점이 출품된 개인전이 23일까지 서울 압구정동 청작화랑에서 펼쳐졌다.
홍익대 조소과 학·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원로 조각가 전뢰진 선생(94)이 아끼는 제자로 일찌감치 알려졌다.
김 작가는 1990년대 전통적인 한국미를 자신들의 조각 모습에 맞게 재해석하자는 뜻으로 모인 젊은 조각가들의 모임 '한국성, 그 변용과 가늠'에서도 활약했었다.
김성복의 가변설치 `꿈수저` [사진 제공 = 청작화랑]
작가가 초기에 돌조각에 집중하던 시절 대표작인 '신화'연작은 어떤 기원이나 바람을 이뤄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꼬리처럼 결합된 민화 속 호랑이 혹은 해태 같은 상상의 동물을 표현했다. 도깨비 방망이가 수저 손잡이에 붙어 있는 조각 '꿈수저'연작으로 발전됐다. 특히 이번에 전시된 가변설치작품 '꿈수저'는 마호가니나무를 깍아 수저를 만들고, 다양한 꿈의 형상을 '팝아트'방식으로 그려 넣었다. 스테인레스스틸 줄로 18개 꿈수저가 벽에 달랑 달랑 매달린 모빌 같은 형태가 재미있다.김성복의 조각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2022) 스테인리스 스틸 [사진 제공 = 청작화랑]
무엇보다 전시장 안에서는 작가의 대표작인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연작이 이번에도 새로운 기법으로 거듭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매우 반짝이는 파란색, 자주색 캔디 도장으로 좀더 날렵하면서 현대적인 인상이 강해졌다. 특히 높이 2m를 웃도는 파란색 대형 스테인리스스틸 조각은 거대한 발을 앞으로 뻗어 마치 날아오를 태세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모양이 우주소년 아톰을 닮았다.작가는 "힘차게 도약하고 달리는 행위를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과 발이 커졌다"며 "기존 돌조각에서 금속조각으로 재료가 바뀌는 과정에서 날렵함이 더해져 안정감을 주면서도 역동적인 형태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달리는 사람 형태 연작은 욕망을 좇는 모습일 수도 있지만,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도 풀이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한국성을 탐구하던 시절 석굴암 금강역사상의 역동적인 이미지가 많은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조각가 김성복이 청작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신작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이한나 기자]
조광석 미술평론가는 "김성복의 '달리는 사람'은 현대인의 육체가 아니라 특별한 힘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행위자의 모습이다"라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움직이는 형상은 인체의 조형성 뿐 아니라 희망을 갈구하는 이야깃거리로 이해되야 한다"고 설명했다.작가의 작품은 공공조형물로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국회의사당 인근 파라곤빌딩 앞에 돌조각으로 달려가는 사람 2인을 표현한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가 있고 여의도역 인근 교직원공제회 앞에 조각 '꿈나무'가 우뚝 서있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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