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177조 실탄장전 버핏…6년만에 M&A 시동 건다는데 [월가월부]
입력 2022-04-03 16:56  | 수정 2022-04-03 22:32
◆ 서학개미 투자 길잡이 / 매경 월가월부 ◆
1998년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은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주 서한에서 투자를 야구에 빗대며 "좋은 투자처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홈런을 날릴 만한 '완벽한 피치'를 기다리고 있다면서 "매일 방망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차별적인 스윙은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이 같은 신념을 가진 버핏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6년 만에 '스윙'을 날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했다. 버크셔가 미국 보험사 앨러게이니를 116억달러(약 14조600억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2016년 항공기 부품 업체 프리시전캐스트파츠를 370억달러에 인수한 이래 가장 큰 거래다. 월가에서는 이번 인수를 두고 수년간 현금을 쌓아온 버크셔가 대규모 투자에 시동을 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버핏의 투자 '타이밍'에 주목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버핏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자 일부 주식을 매도하고 자사주를 대거 사는 등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런 버핏이 우크라이나 사태, 인플레이션 등 불확실성이 큰 시기에 베팅에 나선 것은 미국 경제에 대한 낙관을 시사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자 버핏은 미 4대 항공주를 모두 손절매한 데 이어 은행주 비중도 줄였다. 같은 해 뉴욕 증시가 가파른 반등세를 보였을 때도 그는 신중했다. 2020년 5월 버핏은 "코로나19의 잠재적 충격이 매우 광범위하다"며 미국 주식을 '저가 매수'할 시기가 아니라고 했다. 금융위기 때와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버크셔는 2008년 폭락한 주식과 싼 가격에 나온 우량기업들을 사들이고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돈을 빌려줘 큰 수익을 냈다.

그러던 버핏이 올해 인수·합병(M&A) 시장에 복귀했다. 월가는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미국 경제 충격이 코로나19만큼 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크리스토퍼 로스바흐 제이스턴앤드코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금리를 비롯해 지정학적·경제적 불확실성에 직면한 지금 버핏이 매수에 나선 것은 그가 미국과 세계 경제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표한 것"이라고 했다. 에트빈 발차크 본토벨 포트폴리오 매니저도 FT에 "최근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지만, 버핏은 이번 전쟁 리스크를 팬데믹보다 더 쉽게 정량화했을 수 있다"고 했다.
불과 지난 2월까지만 해도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며 실망감을 내비쳤던 버핏이다. 당시 찰스 멍거 버크셔 부회장과 함께 보낸 연례 주주 서한에서 그는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이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2월 말 S&P500이 조정 국면에 들어가면서 몇 주 사이 버핏의 생각이 달라졌을 수 있다고 FT는 분석했다. 지난달 버크셔는 7차례에 걸쳐 미국 최대 셰일가스 업체 중 하나인 옥시덴탈페트롤리엄 주식을 사들여 옥시덴탈 지분 14.6%를 확보했다.
최근 달라진 자사주 매입 규모에서도 버핏의 변화는 포착된다. 버핏은 매력적인 투자처가 없을 때 현금을 보유하거나 버크셔 자사주를 사들여왔다. 하지만 올해 1~2월 자사주 매수 규모는 총 20억달러로 크게 줄었다.
올 들어 기술주의 전반적인 주가 부진 속에 버크셔는 나 홀로 빛을 봤다. 연초부터 지난달 30일까지 버크셔 클래스A 주가는 18% 상승했다. 클래스A보다 가격이 저렴해 투자 접근성이 좋은 버크셔 클래스B(30일 종가 기준 358달러)도 19% 올랐다. 이 기간 S&P500과 나스닥이 각각 4%, 10% 하락한 것과 대조적이다.
버크셔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미국 지향적'인 게 특징이다. 실제로 회사 전체 수익의 85%가 미국에서 창출된다. 버크셔의 투자 최상위 종목은 애플(전체 포트폴리오의 45% 차지) 뱅크오브아메리카(12.4%) 아메리칸익스프레스(8.1%) 코카콜라(7.0%) 등이다. 데이비드 카스 메릴랜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버크셔의 앨러게이니 인수에 대해 "버핏은 불확실성이 큰 현재 환경에서도 미국 기업에 투자할 좋은 기회가 있다고 본 것"이라며 "세계 투자자들과 금융시장에 신호를 보내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버크셔 주가가 최근 크게 올랐지만 장기투자자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처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버크셔 주주인 크리스토퍼 블룸스트런 셈퍼아우구스투스인베스트먼트 CIO는 배런스에 "2020년 말 이후 버크셔 주가가 50% 이상 올라 최근 몇 년보다는 (주가가) 덜 저렴한 편이지만 여전히 버크셔 주가가 저평가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10년간 버크셔 수익률이 시장 평균을 웃돌 것이라고 주장했다. 투자 전문매체 모틀리풀에 따르면 버크셔의 지난 10년 누적 수익률은 327.8%로 S&P500(288.7% 상승)을 상회한다.
이제 투자자들의 시선은 버크셔의 다음 분기 투자 보고서에 쏠리고 있다. 버크셔의 올해 1분기 투자 현황 보고서는 5월 중순 공개된다. 버핏이 올해 6년 만에 '코끼리 사냥'(대규모 투자)에 나설 수 있다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그는 줄곧 "'코끼리급' 인수·합병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총알'도 충분하다. 버크셔의 현금 보유액은 지난해 말 기준 1467억달러(약 177조4000억원)로 코로나19 전(2019년 4분기 말·1280억달러)보다 크게 불어났다. 5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다. 최근 보유 지분을 크게 늘린 옥시덴탈이 버핏의 다음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추측도 나온다. 버핏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이자 컨설턴트인 로버트 마일스는 "버핏이 옥시덴탈의 가치를 발견한 게 분명하다"며 "옥시덴탈을 인수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해외 증시와 기업 분석 정보는 유튜브 '월가월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QR코드를 찍으면 '월가월부'로 이동합니다.

[신혜림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